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근대개화기
· ISBN : 9788994606507
· 쪽수 : 536쪽
· 출판일 : 2018-03-19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_ 복수의 지식들이 경쟁하는 세계
1부 동아시아 근대의 활자문화 공간
1장_ 윌리엄 갬블과 동아시아 활자문화
2장_ 근대 출판의 기원, 쓰키치활판제조소
3장_ 쓰시마와 부산, 언어와 문학의 공동체
4장_ 국경을 넘나든 활자의 여행
2부 김옥균과 박영효가 꿈꾼 나라
1장_ 굶주림의 반란, 왕조의 황혼
2장_ 문명개화를 위한 차관 17만 원
3장_ 활자와 인쇄기, 현해탄을 건너다
3부 박문국과 동시성의 커뮤니케이션
1장_ 유길준, 신문 창간사를 쓰다
2장_ 널리 세상의 이치를 배우다
3장_ 『한성순보』, 논란의 중심에 서다
4장_ 불타는 박문국, 혁명정치의 파산
5장_ 백성들의 눈과 귀가 되다
6장_ 국한문체와 민족어의 재발견
4부 지식과 상품이 모이고 퍼지다
1장_ 상품과 광고, 자본을 전파하다
2장_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다
3장_ 국립출판사 박문국의 빛나는 시절
4장_ 문명개화의 서글픈 종말
5장_ 광인사와 근대 출판의 길
5부 기원과 신화
1장_ 활자와 근대 433
2장_ 신문과 근대 452
나오는 말_ 의미의 탐구는 멈추지 않는다
부록_ 박문국의 『국용상하책』
주
찾아보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창간호 기사만 보면 『한성순보』가 무가지였는지 유가지였는지 알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신문을 유료로 판매하겠다는 방침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제8호(1883년 12월 11일)의 마지막 면에 신문 구독료가 처음 밝혀져 있다. ‘매1권 가전(價錢) 아(我) 동화(銅貨) 30문(文)’이었다. 8호에 실린 당시 물가를 보면, 싸전(米廛)에서 파는 하미(下米) 한 되(1升)가 60문이었다. 하미 반 되가 신문 1부 값과 맞먹었다. 저포전(苧布廛)에서 파는 하급 저포(下苧布) 한 자(1尺) 값도 신문 1부 값과 같았다. 1881년 10월에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 신문 『조선신보』 의 1부 값 4전(40문)보다는 쌌다.
『한성순보』는 4호(1883년 11월 1일)에 이르러 지면에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인쇄용지가 서양 종이에서 한지로 바뀌었다. 4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1면에 나타났다. 제호 아래에 발행소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통리아문’이 빠지고 ‘박문국’으로만 간략해졌고, 아래에 ‘제4호’가 나타난다. 그 왼쪽에는 ‘조선 개국 492년 계미 11월 초1일’과 함께 ‘중국 광서 9년’이 표기되어 있다. 그전까지 중국 연호는 왼쪽 상단의 난외(書耳)에 있다가 제호 아래로 옮겨간 것이다. 중국 연호가 있던 자리에 서기 연호, 곧 ‘서력 1천8백83년 11월 30일’이 표기되었다. 신문 한 면에 조선, 중국, 서양의 연호가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시간표기 형식은 현재 남아 있는 『한성순보』의 마지막 호인 36호까지, 그리고 『한성주보』에서도 지속되었다.
당시 『한성순보』 는 몇 부나 발행되었을까? 언론학자 정진석은 지방관청에서 납부한 구독료와 구독 부수를 토대로 『한성순보』 와 『한성주보』 가 매호 3천 부 정도 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발행부수를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증거가 남아 있다. 『시사신보』 1884년 1월 25일자(음력 1883년 12월 28일) 기사가 그것이다.
“조선의 『한성순보』는 3천5백 책여(冊余)를 인쇄, 3천 책은 지방으로, 2백 책은 경내(京內)로 관명(官命)으로 팔아넘긴다. 3백 책은 사보고 싶은 자에게 매호 값 30문으로 판다. 어느 쪽으로도 몹시 평판이 좋다고 한다. 특히 해당 신문에 게재된 「지구설략」, 「5대주」 기사 등에서 지구의 모습이 어떤지, 5대주 각국의 대소와 강약이 어떤지 성대하게 논의하고 연호를 쓰고 이학(理學)의 일도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사가 실린 날짜를 보면, 당시 『한성순보』는 9호(12월 21일)까지 발행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교통 사정을 고려하면 7호(12월 1일)나 8호(12월 11일)까지 발행된 상황을 반영할 것이다. 이 기사는 『한성순보』 발행부수가 3천5백 부라고 명시하고, 그 내역까지 자세히 기록했다. 이는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당시 신문의 편집 내지 실무를 맡고 있던 가쿠고로가 보낸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보는 신문 지면에서 처음으로 세 가지 문체를 실험했다. 하지만 이 실험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못했다. 현재 실물이 남아 있는 주보로 판단하면, 29호(1886년 8월 23일)부터는 국한문체가 더 나타나지 않고, 32호(1886년 9월 7일)까지만 한글 기사가 나타난다. 국한문 혼용체 기사는 1호, 2호, 16호, 22~28호에만 보인다. 한글 기사는 1~24호, 31호, 32호에만 쓰였다. 국한문 혼용체 기사가 먼저 사라지고, 국문 기사는 더 지속되다가 47호(1887년 1월 1일) 이후부터는 오로지 한문 기사만 남게 되었다.
주보가 국한문체와 국문체 신문에서 한문체 신문으로 후퇴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국문학자 김영민은 독자층의 성격과 문체 자체의 한계를 그 이유로 꼽았다. 주보는 관청을 중심으로 배포되었고, 독자는 대부분 관리 등 한문 향유층이었다. 그 때문에 보수 지식인 사회에서 저항한 결과 문체 실험이 좌절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언어 형식에 걸맞은 참신한 주제와 내용을 발굴하지 못한 것도 패인 가운데 하나였다. 주보에서는 과감히 한글 기사를 도입했지만, 그 문체에 적합한 기사를 찾기는 어려웠다. 예컨대 주보 창간호에는 한글 전용 기사인 「뉵쥬총논」 이 실렸는데, 외래 지명들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주보의 주 독자층인 한문 향유층들에게는 오히려 한문보다 이해하는 데 더 어려웠다.
국어학자 이기문의 해석도 김영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회를 거듭할수록 주보에서 한글 기사가 줄어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글 기사의 뜻을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이 가독성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나중에 『독립신문』 이 한글 구절을 띄어서 표기한 것은 매우 현명한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