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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고산 윤선도

[POD] 고산 윤선도

윤선도 (지은이)
  |  
큰글
2013-03-20
  |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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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고산 윤선도

책 정보

· 제목 : [POD] 고산 윤선도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4678856
· 쪽수 : 159쪽

책 소개

큰글 시문학선 시리즈 36권.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고산 윤선도의 작품들을 수록했다.

목차

국도에서 배를 돌리며 / 12
하씨 집안에 시집간 당고모의 죽음을… / 14
남가회의 죽음을 슬퍼하며 / 16
수원 벽 위에 쓰여 있는 시에 차운하다 / 18
새벽에 길을 가며 / 20
아버님 대신 차운해 정언 강대진의 시를 갚다 / 22
을묘년 섣달에 남양 큰아버님의 옛집에… / 24
면숙의 유배지로 가는 면부를 보내며 1.2.3 / 26
겸보 숙장의 시에 차운하여 회포를 읊다 / 32
홍면숙에게 지어주다 / 34
길가에 있는 사람에게 장난삼아 지어주다 / 36
잠이 깨어 어버이를 생각하다 1.2 / 38
친구를 생각하다 / 42
정인관암鄭仁觀巖 1.2 / 44
건원보를 나서며 지어 주다 / 48
달을 보고 어버이를 생각하다 1.2 / 50
진호루게 올라 처마 위의 시에 차운하다 / 54
낙망의 시에 차운하다 / 56
다시 앞 시의 운을 쓰다 / 58
집을 짓고 나서 흥에 겨워 / 60
<김 장군전> 뒤에 쓰다 1.2 / 62
아우와 헤어지면서 지어 주다 1.2 / 66
병중에 회포를 풀다 / 70
장자호의 시에 차운하다 / 72
옛 시에 차운하여 가을밤에 우연히 읊다 / 74
묵매墨梅 / 76
가야산에 노닐다 1.2 / 78
낙서재樂書齋 / 82
대재(竹嶺)를 지나면서 / 84
하늘을 깁다 / 86
산속 서재에서 밤새 이야기하며… / 88
다섯 그루 버드나무 / 90
금쇄동金鎖洞을 처음 발견하고 짓다 / 92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 / 94
이웃 스님이 황무지 개간하는 일을… 1.2 / 96
권반금權伴琴과 헤어지며 지어주다 / 100
심희성이 화답한 시에 감사하다 / 102
이계하가 심희성에게 차운해 지어준… / 104
옛 시의 구절을 모아 부채에… 1.2.3.4.5 / 106
차운하며 국경에게 부치다 / 116
정심암淨深菴 / 118
계묘년 세밑에 느낀 바 있어 노소재의… / 120
시름을 풀다 / 122
<부록>
연보 / 124

저자소개

윤선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시조 작가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이며,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다. 1612년 26세의 나이로 진사(進仕)에 급제했고,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6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병진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유배지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의 시조를 창작했다. 1618년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대사면령이 내려 유배에서 풀려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윤선도는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유배를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해,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47세 때인 1633년에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향족(鄕族)과 집안의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이미 적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피해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이후 윤선도는 자연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52세 때인 1638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不奔問)’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게 된다. 이후 해남에 돌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차남에게 맡겼으며, 1640년부터 해남의 금쇄동에 거처를 마련해 은거했다. 이후 10여 년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연작 18수의 시조 작품을 창작했으며, 2년 후에는 <산중속신곡> 2수와 <증반금> 등의 시조를 짓기도 했다. 윤선도가 63세 되던 1649년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지낸 바 있었기에, 이해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렸다. 1651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다. 66세가 되던 1652년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때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몽천요> 3수를 창작했다. 하지만 이내 효종에 의해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고, 당시 권신인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7년(71세)에는 조정에 불려 갔다가 다시 관직에 제수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해 왕릉을 정하는 산릉의 간심(看審)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인을 대표한 논객으로 예송(禮訟)에 참여했다가 패배해,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에 의해 165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1665년(79세)에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백운산 아래의 옥룡동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2년 후인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거처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해, 해남의 금쇄동에 묻혔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윤선도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부로 있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보다는 유배지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반대 당파의 비방에 결연하게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했으며,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6권 6책)가 있다.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작품들로 인해 ‘자연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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