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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5589618
· 쪽수 : 672쪽
· 출판일 : 2005-04-10
책 소개
목차
개정판 서문
제1부 끝의 시작
제2부 기묘한 소명
제3부 못난이 보좌 신부
제4부 중국에서
제5부 귀국
제6부 시작의 끝
작품해설
리뷰
책속에서
비가 오고 있었다. 여관은 문을 닫은 뒤였다. 우리는 둘 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난 광장의 물이 뚝뚝 듣는 아카시아 나무 밑, 젖은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다는 게 여자에게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일어섰다.
“나는 집으로 가요. 바보가 아니라면 내 호의를 거절하지 않을 텐데요.”
내 얇은 법의는 형편없이 젖어 있었다. 떨렸다. 신학원으로 돌아와서 돈을 보내 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어나서 그 여자를 따라 비좁은 길로 내려섰다.
여자의 집은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계단을 두 개 내려가니 부엌이었다. 여자는 등불을 켜고 검은 숄을 벗고는 코코아 주전자를 불 위에 올린 다음 빵 가마에서 빵을 꺼냈다. 그런 다음에는 식탁에다 격자무늬 상보를 깔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조그만 방 가득히 퍼지는, 끓는 코코아와 뜨거운 빵 냄새는 참 좋았다.
여자는 얇은 잔에다 코코아를 따르면서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사 기도를 드리세요. 그러면 음식이 맛이 훨씬 좋아질 거예요.”
여자는 분명히 비아냥거리고 있었지만, 시키는 대로 식전(食前)의 감사 기도를 했다. 그러고는 먹기 시작했다. 음식 맛이 훨씬 좋아지게 하는 데 필요한 기도였다면, 하지 않았어도 좋았으리라. 그 만큼 맛있었다.
여자는 나를 관찰했다. 한창 때는 아름다웠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흔적이 검은 눈의 올리브 꼴 얼굴을 오히려 딱딱하게 보이게 했다. 여자의 조그만 귀에는 묵직한 금 귀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손은, 루벤스의 마돈나 손처럼 소담스러웠다.
“꼬마 신부님, 내 집엘 다 오시다니 운이 좋았던 거예요. 나는 성직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바르셀로나에 살 때는 성직자들을 지나칠 때마다 웃어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웃으면서 응수했다.
“그러셨다고 해도 저는 놀라지 않아요. 우리가 맨 먼저 배우는 게 바로 비웃음을 견디는 것이랍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분은 길거리에서 설교하곤 했지요. 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분을 비웃었어요. ‘다니엘 성자’라는 별명까지 지어 부르면서 놀렸으니까요. 지금 세상에서 말이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위선자 아니면 바보랍니다.”
여자는 천천히 코코아를 마시면서 잔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꼬마 신부님은 바보로군요. 말해 보세요, 내가 마음에 드나요?”
“매력적이고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원래 친절한 여자랍니다. 그런데도 팔자는 눈물 마를 날 없는 팔자지요. 아버지는 카스틸리아 귀족이었어요. 마드리드 정부군 손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말았지만……. 남편은 해군의 아주 큰 군함 함장이었어요. 결국 바다에서 죽었지만요. 나도 한때는 배우였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재산을 환수할 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조용히 살고 있답니다. 내 말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죠?”
“알고말고요.”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여자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얼굴을 붉히고는 나를 조롱했다.
“너무 똑똑해서 탈이군요. 하지만 나는 꼬마 신부님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알아요. 도망 나온 거지요? 남자는 똑같다니까. 꼬마 신부님은 이브가 그리워서 마리아를 버린 거지요?”
무슨 뜻인지 모를 때는 어안이 벙벙하더니 말뜻을 알고 나니 참담했다. 하도 터무니없는 말이라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빵 접시와 코코아 잔은 빈 지 오래였다. 나는 일어나 모자를 집으면서 인사를 했다.
“저녁을 먹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맛있는 저녁이었습니다.”
여인의 표정이 변했다. 놀랐는지, 그 장난기와 심술기가 얼굴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그럼 당신은 바보가 아니라 위선자로군요.”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문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여자가 내뱉듯이 말했다.
“가지 말아요!”
침묵. 여자의 말투가 험악했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나는 내 식으로 사는 여자, 내 식으로 즐기면서 사는 여자니까요. 토요일 밤에 바르셀로나의 카바에 오면 거기에 앉아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까짓 땡중 생활보다는 그쪽 재미가 나을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주무세요.”
또 침묵. 그제야 여자는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내 귀에는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