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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크루즈

임페리얼 크루즈

(대한제국 침탈 비밀외교 100일의 기록)

제임스 브래들리 (지은이), 송정애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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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  
1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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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얼 크루즈

책 정보

· 제목 : 임페리얼 크루즈 (대한제국 침탈 비밀외교 100일의 기록)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근대개화기
· ISBN : 9788996276364
· 쪽수 : 384쪽

책 소개

이야기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 80여명이 1905년 7월 5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하던 날에서 시작된다. 루스벨트는 이 ‘제국주의 순방’을 통해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정책들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루스벨트는 약소국을 향해 미국의 힘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목차

제 1장 그 후 100년
제 2장 문명의 길 야만의 길
제 3장 계몽과 침략
제 4장 태평양 흑인
제 5장 하와이로 간 선교사들
제 6장 명예 아리아인들
제 7장 루스벨트의 게임
제 8장 아시아 먼로주의
제 9장 제국帝國의 길
제 10장 개방과 아편
제 11장 고종高宗 황제와 앨리스 루스벨트
제 12장 한일병합과 루스벨트의 배신
제 13장 태양의 후예들

저자소개

제임스 브래들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제임스 브래들리는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넌픽션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깃발’(2000) Flags of Our Fathers과 '플라이보이스’(2003)Flyboys의 작가이다. 태평양 이오지마섬의 스리바시산정에 성조기를 게양한 생존 미해병대원 가운데 한 명이 그의 부친이었다. 현재 뉴욕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www.jamesbradl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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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애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정신여중과 명성여고에서 교사로 일했고, 한국어판 리더스 다이제스트 창간 멤버로 참여해 이 잡지의 편집장과 주필을 지냈다. 30년 넘게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함께 하며 우리 글 번역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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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장 그 후 100년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1)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1900년 10월 29일


나의 아버지 존 브래들리가 1994년에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그분이 남긴 비밀기록이 담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성조기를 꽂아 세운 6명의 전투병 가운데 한 명이 기록한 생생한 실록이었다. 내가 쓴 책 ‘아버지의 깃발’ Flags of Our Fathers과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태평양에서 전개된 제2차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다른 책 ‘플라이보이스’ Flyboys를 쓴 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미국이 이 치열한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궁금해졌다. 일본군의 진주만 침공으로 시작된 그 끔찍한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 도대체 어디서 그 불꽃이 시작되었는지, 나는 그 최초 발화점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1905년 여름, 테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다. 테디는 육군장관을 비롯해,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 다수의 군인 및 민간 관료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으로 가는 대양 횡단 선박에 태워 출발시켰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무장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존 헤이 국무장관이 사망한 직후였고, 엘리후 루트 장관은 아직 취임 승인을 받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제국주의 순방’imperial cruise을 통해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향후 수세대에 걸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결정들을 내렸다.
체중이 147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사절단장이었다. 대통령은 루스벨트라는 이름이 신문 일면을 장식하도록 당시로 치면 재키 케네디 뺨칠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스물 한 살의 딸 앨리스를 의도적으로 사절단에 포함시켰다. 앨리스는 당시 ‘앨리스 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앨리스의 애인도 동행했기 때문에 태프트 장관은 두 사람을 잘 감시하겠노라고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물론 그 임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씨가 무더운 밤에는 미혼의 미국 대통령 딸이 배의 컴컴한 구석에서 무슨 일을 할지 몰라 태프트 장관은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아시아로 미국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열망이 아주 강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는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서 우리가 어떤 입지를 차지하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다.”2) 루스벨트는 미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한 것처럼 아시아 전역으로 미국의 세력이 확장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전진에 방해가 되는 대상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서부로 점령지를 넓혀나가는 것을 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새로운 요새들이 계속 세워졌고, 그 요새들이 마을과 도시로 발전했다. 이제 미국은 아시아를 문명지대로 만든다는 목표 아래 태평양에서 해군 연결망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1898년에 미국에 합병된 하와이는 그러한 계획의 첫 단계였고, 필리핀은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테디는 아시아에 가본 적도 없고, 아시아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아시아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다. 그는 이렇게 공표했다.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나의 꿈이다.”3)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명일 뿐 아니라, 대단한 지성과 용기를 갖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휘둘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이 책은 1905년 그 운명의 여름, 아시아를 상대로 그가 내뱉은 부드러운 속삭임 뒤에 엄청나게 큰 몽둥이가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그가 휘두른 몽둥이가 남긴 상처들은 태평양에서 벌어진 제2차세계대전, 중국공산혁명,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긴장사태들을 일으킨 불씨가 되었다. 20세기 미국의 아시아 외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남긴 궤적을 따라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2005년 나는 당시 제국주의 순방imperial cruise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보았다.
앨리스 공주가 그랬던 것처럼 와이키키에서 파도타기를 했고, 앨리스가 본 것을 보았으며, 왜 하와이 원주민이 아무도 앨리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은 북태평양 지역에서,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모두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국익을 키우기 위해 일본에게 군사력을 키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1905년 여름, 도쿄와 워싱턴 사이에는 비밀외교 메시지가 태평양 수면 아래 깊은 곳에 설치된 해저 케이블을 통해 분주히 오갔다. 일본 총리와의 극비 회동에서 태프트는 막후조정을 통해 일본이 아시아대륙으로 확장해 들어가도 좋다고 허용하는 비밀협정이 성사되도록 했다.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 없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루스벨트는 일본과 비밀협상을 벌이는 동시에 당시 사상 최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정직한 중개자’ 역할을 했다. 두 교전국은 그해 여름 포츠머스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그 결과로 일 년 뒤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비밀협약에 대해 전혀 몰랐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간 이 비밀외교 전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사망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1902년 7월 4일 루스벨트는 이슬람 교도 지역에 일부 동요가 남아 있긴 하지만 필리핀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은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다. 1905년 미국의 제국주의 순방선이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약 830킬로미터 떨어진 이슬람 문화권 항구도시 잠보앙가에 입항했다. 거구의 ‘빅 빌’ 태프트가 필리핀에 미국이 가져다 줄 혜택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소리 높여 연설할 때, 앨리스 공주는 뜨거운 열대의 태양 아래서 펀치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뒤에 나는 잠보앙가 행을 감행했고, 그 지역의 이슬람 교도들이 당시 태프트의 메시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보앙가의 관리들은 미국인인 나의 안전이 우려된다며 나보고 무장경관의 호위 없이는 호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시내가 아주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에 잠보앙가 경찰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사복 차림의 경찰관 한 명과 함께 기사 딸린 자동차를 타고 시청 옆을 지나게 되었다. 멋진 오래된 목조 건물은 한때 미군 사령부였다. 미국의 ‘블랙 잭’ 퍼싱 장군이 그곳 집무실에서 이 지역 이슬람 교도들을 통치했다. 길 건너편에 있는 그늘진 잔디밭 공원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여기 좀 세워줄 수 있나요?” 이렇게 부탁하자 운전기사는 보도 쪽으로 차를 세웠다. 나는 시청 바로 앞이니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혼자 차에서 내렸다. 환한 대낮이었고 번화한 도심이었으며, 더구나 바로 옆 미국인의 이름을 딴 공원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경호원의 생각은 달랐다.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오른 손을 옆구리에 찬 권총 위에 올린 채 지나가는 행인과 자동차, 그리고 건물의 창과 지붕 위를 날카로운 눈길로 살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잠보앙가의 대형 쇼핑몰 안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바지를 사려고 진열대를 살피고 있는데, 경호원은 등을 내 쪽으로 향한 채 붐비는 인파 쪽을 경계의 눈초리로 살폈다. 내가 그곳을 떠난 다음 잠보앙가 경찰은 필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내가 떠나고 난 바로 다음 날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잠보앙가를 급습했다. 두 개의 강력한 폭탄이 터져 26명이 다치고 건물 여러 채가 파괴됐다. 자동차들이 날아갔고, 전선이 끊어져 온 도시가 암흑과 공포에 휩싸였다. 첫 번째 폭탄은 내가 불과 얼마 전 걸었던 보도의 시멘트 바닥을 움푹 파놓았고, 두 번째 폭탄은 잠보앙가 경찰서 바로 옆 호텔을 붕괴시켰다.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쇼핑몰로 이어지는 도로였다.4) 경찰 소식통은 폭탄테러가 이슬람 반군 요인을 추적하는 필리핀군과 미군의 수색작전을 교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5)
루스벨트는 총칼을 앞세웠으나 필리핀에 평화도 민주주의도 가져오지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2년에 승리를 선언한 그 순간, 실제로 미군은 남부 필리핀의 이슬람 반군에 대해 대대적인 전면공세를 다시 시작했다.6) 잠보앙가를 진압해 평화를 회복하는 게 그 전면공세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미군은 그 ‘평화 도시’ 인근에서 여전히 전투 중이었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사이의 중요 현안은 무역분쟁이다. 중국에서 나는 1905년에 성난 중국인들이 태프트 장관의 방문에 항의하며 폭동을 일으켰던 그 거리를 따라 걸었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의 교역을 중단하고 모든 미국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분노한 중국인들은 대규모 반미 집회에 참여했다. 시내에 있는 건물 벽 곳곳에 미국을 욕하는 반미 포스터들이 나붙었고, 현지의 미국 외교관들은 태프트 일행이 중국을 방문해도 좋을지 안전문제를 놓고 논의를 거듭했다. 테디와 빅 빌은 중국인들의 분노를 무시하고 방문을 강행했다. 하지만 1905년에 전개된 미국에 대한 불매운동은 중국 전역에 격렬한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중국공산혁명으로 이어졌으며, 1949년 중국과 미국의 국교단절을 가져왔다.


2005년에 나는 1905년 앨리스 공주가 대한제국의 황제를 위해 건배를 들었던 서울에 갔다. 1882년 고종*은 문호를 개방했고, 첫 서방 수교국으로 미국을 선택했다. 미국이 연약한 나라를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 그는 미국무부에 이런 말을 여러 차례 했다.7) 1905년 고종황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에 공명정대한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고종이 짐작도 못하는 일이 워싱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루스벨트는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8) 결국 앨리스가 한미 우호를 위해 축배를 든 지 2개월도 되지 않아 앨리스의 부친은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을 폐쇄하고, 그 약한 나라를 일본군 앞에 내버려 두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서열 2위의 미국 외교관은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치는 쥐들처럼’ 미국이 대한제국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했다.9)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인정한 첫 번째 나라였다. 고종황제가 보낸 밀사들이 일본의 만행을 중지시켜 달라고 간청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한제국은 이제 일본의 일부분이니 앞으로는 도쿄를 통해서 탄원하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대한제국을 배신함으로써 루스벨트는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영토 확장 계획에 파란불을 켜 주었다. 그리하여 수십 년 뒤에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은 테디 루스벨트가 행한 비밀협약의 결과로 빚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905년 이래로 미국은 아시아에서 네 번의 큰 전쟁에 휘말렸다. 전쟁의 상흔은 지도 위에 나타나는 표시뿐만이 아니라, 줄지어 늘어선 전사자 묘비와 가슴아픈 사연들로 남았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가 지나도록 루스벨트의 비밀 사절단에 대한 진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 비밀외교 행각의 의미는 미국은 좋은 나라라는 신화를 지키기 위해 감춰지고 무시되었다. 또한 블랙 힐스의 화강암 바위에 워싱턴, 제퍼슨, 링컨 대통령과 함께 새겨진 현명하고 정의로운 대통령이라는 루스벨트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개인적인 인물 한 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경우 루스벨트 혼자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정의로운가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당시 그가 차지한 지위와 권한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 파장은 재난을 불러일으켰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려 다치게 했는데, 부상의 원인으로 그 벼랑의 높이만 지적한다고 치자. 누가 누구를 밀어서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정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고, 어떤 실수가 자행됐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역사책이나 기념비, 영화, 우표에는 진실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성냥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다이너마이트에만 관심을 쏟았다. 1905년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뒤에 나는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당시의 대한제국에 몰아친 격동의 역사 현장을 따라가 보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알아낸 진실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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