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역사
· ISBN : 9788997581009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2-03-02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장 백성을 하늘처럼 섬겨라
검결劍訣 | 최제우
수운이 말하기를 | 신동엽
유언시 | 전봉준
새야 새야 파랑새야 | 구전 민요
· 국어 선생님의 한국 근대사 강의 | 동학
2장 개화기 풍경
척화비 | 흥선 대원군
경복궁 타령 | 구전 민요
달은 비록 작으나 | 김옥균
애국가 | 이필균
가요풍송 | 작자 미상
백두산 일기 | 이중하
경부 철도가 | 최남선
신고산 타령 | 구전 민요
괘씸한 서양 되놈 | 신재효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 신돌석
의병 정용기 | 고은
국채 보상가 | 이병덕, 김인화 등
· 국어 선생님의 한국 근대사 강의 | 개화기
3장 나라 안의 독립 운동
예언시 | 나철
장부가 | 안중근
거국가 | 안창호
총욕불경 | 김구
권고 현내각 | 작자 미상
절명시 | 황현
오직 이 한 목숨 던지노라 |이중언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 | 민영환
삼일절 노래 | 정인보
유언 | 유관순
해주 기생 독립 선언문 | 문월선 등
6?10 만세 운동 투쟁문 | 작자 미상
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 비문 | 작자 미상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박열
김상옥 열사 | 구본웅
· 국어 선생님의 한국 근대사 강의 | 일제 강점기
4장 만주의 독립 운동
홍대장 가는 길에는 | 작자 미상
독립군가 | 작자 미상
광복가 | 윤봉길
신흥 무관학교 교가 | 작자 미상
한나라 생각 | 신채호
압록강 행진곡 | 작자 미상
기전사가 | 이범석
· 국어 선생님의 한국 근대사 강의 | 만주
참고 문헌
수록 시집 및 도서
작가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듯이 3ㆍ1 운동은 대한민국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 전문을 읽어 보자.
(중략)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국경일에는 행사를 꼭 치르고 넘어갔던 것 같다. 쉬는 날이라서 수업은 하지 않았지만 기념식을 하러 10시까지 학교에 등교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박정희 군사 정권이 국민들을 다잡기 위하여 그런 동원 체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생각해 보니 학교에서 기념식 노래를 모아 놓은 음반도 사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지 그 시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이 삼일절 노래를 정확하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서 삼일절 노래를 한번 불러 볼까!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중략)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 말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였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국가의 식민지를 처리함에 있어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이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 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쿄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1919년 2월, 2ㆍ8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 선언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 등이 참여함으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 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ㆍ진남포ㆍ안주ㆍ의주ㆍ선천ㆍ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 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운동을 준비한 종교계의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의 취지만 밝힌 후 일제 경찰에 자수해 버렸다. 폭력 사태를 막으려고 했다는데, 약간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태화관에 얽힌 일화를 알아 보자. 매국노 이완용이 살던 집은 원래 헌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가 살던 집으로 ‘순화궁’으로 불렸는데, 1908년 이완용 손에 넘어갔다. 그런데 이 집의 고목이 벼락을 맞았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완용이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이완용은 결국 이 집에서 살지 않게 되었고, 이 집은 나중에 요정 명월관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태화관이 되었다.
(중략)
그런데 3월 1일이라는 날짜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원래 고종 황제의 인산(발인)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많이 모일 것으로 예측하여 거사 날짜를 3월 3일로 정했는데,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의 의견과, 2일은 일요일 안식일이므로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으로 결국 3월 1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