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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 ISBN : 9788997735495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14-11-01
책 소개
목차
글을 시작하며 | 80년 전의 대장정에 주목하다
1장 | 그날 기묘한 탈주가 시작되다
장정이 아닌 탈주
작은 대장정, 출발하다
혁명의 용광로 상하이
2장 | 마오 봉건에서 혁명과 권력으로
마오쩌둥 일생의 대장정이 시작된 곳, 창사
양카이후이와 함께 혁명의 씨앗을 키우다
혁명소녀 허쯔전의 비극적인 삶
3장 | 참패 핏물로 범람한 샹강
신중국을 지탱하는 힘, 열사능원
허리가 잘려버린 참혹한 패배
좡족과 야오족의 룽성을 지나 퉁다오로 향하다
4장 | 부활 마오쩌둥의 반격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다지다
자오싱의 둥족과 카이리의 먀오족
쭌이에서 부활한 마오쩌둥
5장 | 질주 1 강한 적을 현란하게 속이다
아군조차 어지러운 기만작전, 사도적수
구이저우에서 설을 보내고 윈난으로
6장 | 질주 2 목숨 건 루딩교 전투
드디어 창강을 건너다
무한질주로 루딩교를 탈취하다
7장 | 고난 설산과 습지와 내분
설산 넘어 제4방면군과 만났으나
내분이 발목을 잡고
악마의 아가리, 습지
8장 | 승리 반전의 회생, 위대한 승리
홍군끼리 총질할 순 없다!
라쯔커우 협곡을 돌파하다
드디어 종착이다!
9장 | 실패 스스로 망할 일만 했다
시안사변의 현장을 찾아서
장제스는 왜 실패했나
남의 일 같지 않은 대참사
글을 마치며 | 참담한 심정, 고마운 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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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대의원으로 시작해서 1927년 후난성의 추수봉기와 징강산 유격전을 거쳐 장시성 남부에 소비에트를 건설해낸 마오쩌둥에 비하면, 보구는 나이나 경력에서 애송이 수준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그를 신임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념적 이상이었고, 코민테른을 통해 모든 것을 재가받아야 하는 상전이자 돈줄이었다. 그런 탓에 이래저래 모스크바 유학파들이 실세를 이루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에 대해서도 지휘는커녕 발언할 입장조차 되지 못했다. 자신이 장정에 참가할지 잔류할지도 스스로 결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1934년 6월 대장정이 결정되자 구체적인 방법을 세세하게 준비하고 결정하는 것은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였다. 이 3인단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대장정을 출발할 때 마오쩌둥은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위두하를 건너야 했다. 왕따 신세인 데다 몸도 성치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저우언라이가 때때로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그의 의견을 청취해주는 것이 위안이었다.
현지인이 아니면 알기 힘든 이런 사람들의 희생과, 그 희생을 기록해둔 후손들이 있기에 지금의 중국이 있는 것이 아닐까. 권력에는 그늘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중국은, 결코 음모의 밀
실정치나 선전선동, 개인 숭배로 만들어진 우스꽝스러운 나라가 아니다. 시대의 광풍 속에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두 다리로 서 있는 나라다. (……) 중국에는 열사공원 또는 열사능원이 현縣마다 있고, 예외 없이 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엄숙주의가 무겁게 흐르지도 않는다. 아침에 시민들이 찾아와 태극권이나 체조를 하고, 오후에는 선남선녀가 데이트를 즐긴다. 열사공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엄마의 고생을 모르던 철없는 아이들이 어느새 부모가 되어 철없는 자식을 품어주듯, 지금은 후손들에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내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중국이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라지만 결코 사상누각이 아니라는 것을 루청의 열사공원에서 새삼 느꼈다.
중앙소비에트에서는 1935년 2월 5일 잔류자들이 중앙국 확대 회의를 열고 유격전으로 전환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곧이어 천이가 중앙정부 명의로 군중대회를 소집하여 혁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고 2000여 명의 부상병을 한 사람씩 데리고 가서 치료해달라고 호소했다. 지역 인민들은 홍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데려다 보살펴주었다. 부상병들은 건강을 회복하자 홍군 유격대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고, 유격대는 훗날 신4군을 창설하는 근간이 되었다. 당시 홍군이 지역 주민들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