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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7751150
· 쪽수 : 241쪽
· 출판일 : 2013-02-15
책 소개
목차
1권
정오의 중대뉴스
마이크와 총
해직자
단파라디오
글루미 선데이
송년파티
2권
방송 통폐합
제국의 아나운서(1)
제국의 아나운서(2)
파멸의 소리, 그리고 희망의 언어
사라진 전파
고별방송
두 비스트 비 아이네 블루메
작가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해방의 정오, 그 낮 12시는 전율의 시간이었다. 한순간의 시점을 기준으로 세상이 그리도 이전과 이후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떨렸다. 나는 스튜디오 마이크로폰 앞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녹색의 원탁에 덩그러니 놓인 마이크를 응시했다. 마이크 받침대에 영문자로 새겨진 JODK 방송국 마크가 또렷했다. 마이크는 내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 시작을 알리는 램프에 빨간불이 켜졌다. 나는 원고를 읽어나갔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송이었다.
하긴 ‘천황폐하’를 발음할 때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조선 아나운서도 있었다. 제2 조선어방송의 가네야마가 바로 그랬다. 가네야마는 스튜디오에 들어가 방송을 하는 중에 그 대목이 나오면 즉석에서 공손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의 행동은 누가 시킨 게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1방송 일본인 직원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고, 상사들의 총애를 받으며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올해의 모범사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라키리의 시간, 그들에게 낮 12시, 정오는 절망의 시간이었다. 정오의 항복방송을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였을까, 절망보다 죽음이 차라리 나아서였을까, 낮 12시가 되기 전 그들은 하나하나 칼로 배를 가르며 쓰러졌다. 방송 마이크 앞에서 절명사를 고하려던 소좌도, 방송국 보도국장을 심문하던 소좌도, 항복방송 녹음 레코드판을 찾아내려던 중좌도 뜨거운 태양 아래 선혈을 쏟았다. 피비린내가 바람결에 해자를 건너 성곽을 넘어 궁성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