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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디 시티

윈디 시티

조아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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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디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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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윈디 시티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04907807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16-05-12

책 소개

조아라 장편소설. 시카고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담조는 어느 날 우연히 또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알게 된다. 지인으로부터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자살을 기도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시선을 준다. 그러다 퍼포먼스 공연에서 그녀를 다시 발견하고, 담조는 그녀에게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인 형의 모습을 기억하게 된다.

목차

1.
2.
3.
4.
5.
6.
7.
8.
9.
10.
11.

가고 난 자리에 피어난 바람
작가 후기

저자소개

조아라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과감한 색과 네러티브(이야기)가 드러나는 회화 작업을 한다. 열일곱 살 때, 발령을 받은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외국생활을 했다. 그 후 학업을 위해 부모님을 설득하여 시카고 예술 대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회화 외에도 글로 다양한 인간관계를 풀어내는 것을 좋아해 틈틈이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 《윈디 시티》가 있다. 현재 뉴욕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 중이다. 인스타그램 @arachoart 웹사이트 arachoart.com 이메일 arachoar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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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봄이 찾아왔습니다.”
담조는 구연동화를 하듯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창틀에 기대어 있는 그의 호흡을 따라 유리에 따뜻한 입김이 서렸다.
“……딱 그 꼴이야, 그 꼴.”
그는 졸린 눈을 반쯤 뜨고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는 도시를 내다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스튜디오에서 밤을 지새우다 어제 저녁, 간신히 집에 돌아와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다. 그 뒤로는 새까만 암전. 간신히 완성한 작업들만이 기억의 전부였고 다음 날 일어나 커튼을 젖혀보니 신기하게도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봄이 온 것도 깨닫지 못하는 피곤한 삶이여……. 젠장. 우중충한 건물들이 산뜻해 보이는 건 수면 부족으로 인한 착시현상일 거라 믿고 싶다.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곧장 집을 나섰다. 몸이 개운한 것이 마치 짐승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탈피한 기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추웠던 것 같은데, 피부에 와 닿는 바깥 공기가 무척 따스했다. 밀레니엄 파크의 넓은 잔디밭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고 그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의 가지에선 새 잎사귀들이 싱그럽게 돋아 있었다. 그런 풍경을 간직한 미시간 에비뉴를 거닐다가, 문득 코끝을 스치는 튤립 향기에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벌써 4월.
그것만이 아니다. 벌써 중순을 넘어가고 있으니 5월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무심하단 소린 귀에 박히도록 많이 들었지만 시간마저 망각하는 놈이었을 줄이야. 새삼 자신이 한심스러워 담조는 피식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나온 미시간 에비뉴는 봄을 만끽하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쭉 걷는 것만으로도 시카고 미술관, 밀레니엄 파크, 존 핸콕 타워 등등 시카고의 유명 관광지들을 대부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로 가는 길이었던 담조는 봄기운도 만끽할 겸 밀레니엄 파크를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머리 위를 내리쬐는 다사로운 햇빛에 가뜩이나 찌뿌듯한 몸이 더 나른해졌다. 오랜만에 맞은 여유로운 주말. 오후 두 시에 잡힌 약속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책 한 권과 카메라를 들고 학교가 아닌 저 푸른 잔디를 향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공원에는 튤립들이 한창이었다. 빨강, 노랑, 하양, 햇살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강렬한 원색의 물결들.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 즈음마다 벌어지는 봄맞이 도시 행사였다. 봉오리 진 채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앙증맞기도 하고 절정에 치달은 봄기운과 눈부시게 어울렸지만, 담조는 그 꽃물결들을 볼 때마다 괜히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지금은 보기 좋은 관상용일지 모르나, 낯선 곳에 인위적으로 심어진 그 꽃들은 항상 이맘때쯤 찾아오는 꽃샘추위를 얼마 견디지 못하고 픽 쓰러지고 말았고, 여름이 오기 전 인부들의 손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치워졌다. 아름다운 시작과 달리 쓸쓸한 말로였다, 그건.
“어, 형. 지금 가고 있어.”
산뜻한 바람이 머리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언제 도착하느냐는 석진의 전화에 담조는 5분이면 도착한다고 가볍게 답하다가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다.
“뭐, 3층으로 오라고?”
[수아가 보여줄 게 있대. 센터랑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남았으니까 일단 이리로 와.]
알겠다고 대답한 담조는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순수미술학과들이 있는 콜럼버스 빌딩의 3층은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페인팅 부서가 있는 곳이었다. 사진과 소속인 그가 이곳에 올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지고 눈이 바빠졌다.
사진과가 하얗고 멀끔한 느낌이라면, 이곳은 곳곳에 묻은 페인트 자국들과 유화 냄새 때문에 칙칙하고 정돈이 덜 된 느낌이었다.
실기실 문 하나가 열려 있는 걸 발견한 담조는 걸음을 멈추고 슬쩍 안을 살폈다. 수업 중인지 학생들이 각자 자리를 펴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젤에 놓고 그리는 사람, 바닥에 놓고 그리는 사람, 벽에 걸어놓고 그리는 사람. 그리고 아크릴을 쓰는 사람, 유화를 쓰는 사람, 잉크를 쓰는 사람. 작업 방식과 매체가 모두 자유로우면서 달랐다. 가장 놀란 건 복도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물함 위에 자리 잡은 캔버스들이었다. 어림잡아도 수백 개는 족히 될 것 같은 캔버스들이 빼곡히 차 있는 장관은 다른 과에서도 여간해선 보기 힘들었다.
“오빠, 여기야, 여기.”
복도 맨 끝에 있는 실기실에서 남색 앞치마를 입은 수아가 문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뭘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오라고 해?”
빈 교실에서 홀로 작업 중이었는지 넓은 공간에 학생이라곤 달랑 수아 한 명뿐이었다. 담조처럼 그녀의 등쌀에 못 이겨 이곳까지 행차한 석진은 ‘내 말이 그 말이다’라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 크리틱 있다고, 그림 좀 봐달란다.”
“……우리는 영상이랑 사진 전공이잖아.”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담조는 고개만 돌려 수아를 쳐다봤다.
“차라리 네 친구들한테 물어보지그래.”
“전공 다르다고 그림을 못 봐? 둘 다 아무 전시회나 잘만 쏘다니면서 내가 부탁만 하면 그렇게 생색내더라.”
눈을 가늘게 뜨고 비죽거리던 수아는 어서 보라는 듯 벽에 늘어놓은 그림 네 점을 가리켰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담조는 몸 방향만 슬쩍 비틀어 그림들을 주시했다.
“뭐…… 잘했네.”
“그게 다야?”
“그럼 여기서 더 얘기할 게 있어?”
“크리틱 하는 것처럼 말해 달라고, 크리틱!”
“정말 진심으로 할까?”
슬쩍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짓궂어졌다. 장난스러워 보여도 그 안에 감춰진 진지함을 알고 있는 수아는 뭐라 반박하려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됐어. 보나마나 감동이 없네, 취향이 아니네, 독설만 늘어놓을 거면서.”
“잘 아네.”
씩 웃은 담조는 수아의 앞머리를 장난스럽게 흩뜨렸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수아의 눈빛이 은밀하게 흔들리는 걸, 석진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꾹꾹 숨기려 해도 못다 한 순정을 전부 감추기엔 그의 사촌동생은 아직 어렸다.
“그럼 우리 간다.”
“잘 가라! 하여간 둘 다 쌍으로 못됐어.”
일하러 가기 전에 잠시 들른 거라 그들은 수아가 뒷정리하는 걸 기다려 줄 수 없었다. 반쯤 빨다 만 붓을 손에 쥐고서 소리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석진은 킬킬거리며 교실 문을 닫았다.
“어휴, 저 녀석 갈수록 피곤해지네.”
“봐줘야지. 한국에서 힘들게 붙은 대학들 다 놔두고 형 따라 여기까지 온 거잖아.”
“나를 따라?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담조는 별다른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것이 더 이상 이 주제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임을, 그리고 그걸 꺾기엔 그가 소고집임을 잘 알기에 석진은 그저 속으로 ‘불쌍한 내 동생’ 하며 찌뿌듯한 목을 문질렀다.
계단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 담조의 눈에 유리 진열장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가 들어왔다. 걸음이 저절로 느려지다가 이내 그 앞에 멈춰 섰다. 꽤 널찍한 진열장 안을 가득 채운 캔버스 한 점. 두 팔 벌려야 간신히 잡힐 것 같은 너비와 그의 상체만 한 높이의 유화 작품이었다.
젯소를 칠하지 않은 날것의 캔버스 위에 여러 개의 사람 손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검은 물감 사이로 유영하고 있었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비율에도 맞지 않고 시점도 맞지 않았지만 역동적이고 난폭했다. 보는 이에게 한 차례씩 폭격을 퍼붓는 것 같았다. 발바닥 밑에서부터 피어오른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뭐 해? 어서 가자.”
“아, 응.”
학생들 작품을 보여주려고 만든 진열대 같은데, 아쉽게도 이름이 없었다. 문을 열고서 기다리는 석진 때문에 담조는 결국 뭉그적거리며 억지로 발걸음을 떼었다.
“왜 그래?”
“아니, 좀…… 오랜만에 맘에 드는 그림을 봐서.”
“호오, 구담조의 극찬인데. 옆에 수아가 있었다면 난리가 났을 거야.”
석진이 키득거리며 응수하는 사이, 그들은 계단을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와 복도 맨 끝에 있는 퍼포먼스과 전용 대강당으로 향했다.
「조명 다시 한 번 켜봐.」
「프로젝터 점검 끝났어?」
「누가 샌드백 좀 더 가져와 봐! 삼각대 흔들리잖아.」
크림색 불빛이 은은하게 깔린 대강당은 분주했다. 내일 저녁에 있을 퍼포먼스 쇼의 오프닝 리셉션과 그 전에 있을 리허설에 맞추려면 오늘 반드시 모든 설치 작업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총괄 지휘자인 데이빗은 대강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카메라 배치에 대해 의논하는 건지 퍼포먼스과의 학장과 도면을 보며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
담조보다 두 살 많은 석진은 작년에 석사를 마친 뒤 학교 행사 전담 스태프가 되었다. 그런 그가 아직 학생인 담조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내일 있을 MFA 퍼포먼스 쇼를 준비하던 중 촬영 어시스턴트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귀찮은 건 죽어도 하지 않는 도도한 구담조를 설득하느라 조금 애먹었지만 꽤 높은 일당은 그의 콧대를 부러뜨리기엔 충분했다.
「우리가 혹시 늦은 거예요?」
데이빗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딱 맞춰서 왔어. 아 참, 미디어 센터에서 연락 왔는데 우리가 맥클린까지 갈 필요 없대. 여기 콜럼버스까지 사람 보내준다고 했거든.」
「그거 다행이네요.」
맥클린 빌딩은 학교 건물들 중 하나로, 그곳에 위치한 미디어 센터가 영상학과들이 쓰는 전문 카메라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콜럼버스 빌딩은 다른 건물들과 제법 떨어져 있어서 직접 장비들을 보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어라, 쟤는…….」
촬영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도중, 문득 고개를 든 석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담조도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 강당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스무 살 갓 넘었을까. 강당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아담하고 앳된 동양 여자였다. 미디어 센터에서 왔는지 그녀는 카메라 가방을 잔뜩 실은 검은 카트를 끌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푸른 스키니 진에 하얀 티셔츠. 그 위에 걸친, 자작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빈티지 풍의 조끼. 오목조목한 인상과 옷 스타일을 보자마자 한국 유학생일 거란 직감이 들었다. 담조는 다시 석진을 쳐다봤다.
「왜?」
「아니, 그게…….」
데이빗은 다른 쪽을 점검하느라 잠시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망설이듯 머리를 긁적인 석진은 주위를 살피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수아가 한국에서 예고 나온 거 알지? 저번에 집에 데려다주다가 우연히 저 애랑 길에서 마주쳤거든. 짧게 인사를 나누기에 아는 사이냐고 물었더니, 예고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자살 기도한 애로 유명했다더라.”
무심하기만 하던 담조의 눈이 그제야 석진을 향했다.
“자살 기도?”
“응, 여름방학 후에 갑자기 학교를 안 나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애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있었대. 그 후엔 시골로 전학 갔다는 얘기만 들리고 아무도 소식을 몰랐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더라고.”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찌푸린 담조는 손에 든 카메라 배치도를 보다가, 다시 여학생을 흘긋 쳐다보았다. 카메라 담당자를 찾고 있는지 여학생은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살. 그 위화감 섞인 단어에 기분이 나쁘거나 측은함이 드는 건 아니었다. 호기심도 들지 않았다. 그저, 본의 아니게 뒷담을 하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옆에 있는 남자의 도움으로 카메라 담당자를 찾은 게 분명했다. 순간 뜨끔하는데 여학생이 카트를 밀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두 분 중 누가 석진이죠?」
여자의 영어발음은 부드러웠다. 과장스럽지 않고 소극적이지도 않은, 굳이 따지자면 명랑함이 드는 능숙한 말씨. 석진이 자신이라고 밝히자 여자는 살짝 미소 지으며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짙은 보조개가 하얀 뺨에 살며시 패여 들었다.
「여기에 사인 해주시고요. 카메라들은 거기에 적힌 시간까지 돌려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석진이라는 이름을 봤으면 그가 한국인이란 걸 알 텐데도 여자는 굳이 한국어를 쓰지 않았다. 석진도 영어로 대답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이상 잘 모르거나 처음 본 사람에게 영어를 쓰는 건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사인한 종이의 점선을 따라 둘로 찢은 여자는 그중 한쪽을 석진에게 건넨 뒤 카트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할 일을 모두 마쳐 개운하다는 듯 작게 흥얼거리며 콩콩 뛰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뒷짐 진 손 안에선 얇은 종이가 꼬리처럼 팔랑거렸다. 담조는 그 여유롭고 발랄한 몸짓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도저히…….
“도저히 자살 기도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옆에서 석진이 중얼거렸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알아선 안 될 사실을 알아버린 느낌. 검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보며, 담조는 자신의 가슴 한구석이 쓸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시선을 거두며 석진을 따라 카메라 가방들을 하나둘씩 열어 세팅을 시작했다. 강당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여명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시카고의 야경이 남색 밤하늘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오렌지 크림색의 옅은 조명이 내리쬐는 강당 안은 긴 줄을 기다려 들어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사히 모든 작업을 마친 담조도 관객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다음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방송실의 조그만 창문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석진이 보였다. 도와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비디오 촬영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석진과 눈이 마주친 담조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석진이 엄지를 들며 눈을 찡긋했다.
공연은 개인 퍼포먼스가 끝나면 십 분씩 휴식 시간을 주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석사 학생들이어서 그런가. 별 기대 없이 관람을 시작했던 담조는 생각보다 질 좋고 심오한 공연에 내심 놀랐다. 내년엔 자신도 졸업인데 졸업 작품으로 뭘 준비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팸플릿을 펼쳐 다음 공연의 제목을 살폈다. 줄리엔 가이치먼트라는 학생의 . 앞선 공연들과 달리 이번엔 서서 관람하는 건지 주변에 의자가 없었다.
조명이 서서히 꺼지면서 어느덧 한 치 앞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사위가 어두워졌다. 잠잠해진 관중 속에 있으니 주변 사람들의 숨소리와 재채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위이잉.
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 놓인 벽 전체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하고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순간 몸이 굳었다.
쏴아아, 강당 안을 가득 메우는 바람 소리에 맞춰 갈대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일순 가슴을 내리치는 아련함에 담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바람 소리에 맞춰 알싸하게 떨리는 심장이 가슴 깊이 묻어둔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켰다. 눈앞에 펼쳐진 지독한 데자뷰. 귀신에 홀린 듯 영상을 보고 있는 그때,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팟, 강당의 한구석을 밝혔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아무도 없던 자리에 여자가 있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의자에 기대 앉아 있는 그녀는 새하얀 조명에 창백한 이마와 두 뺨이 도자기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곱게 감긴 속눈썹과 살짝 벌린 입술은 탐스러운 과실을 떠올리게 했다. 그 모습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여자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동양 인형.
천상에서 내려온 미모도,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몸매도 아니었지만 조명 밑에 드러난 가냘픈 팔다리와 가는 선이 관중의 시선을 끌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영상과 갈대밭이 물결치는 생생한 바람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잠이 든 여자. 죽은 듯 편히 잠든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데도, 강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서 말초적인 유혹을 받고 있었다.
말 그대로 Dreamlike.
몽환적인.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는 그때 갈대밭을 등진 현실 속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근육이 균형 있게 잘 잡힌 남자는 맨발에 새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담조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그 남자가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분명 서양인인데, 남자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과 닮아 있었다.
“형…….”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미약한 중얼거림은 넓은 강당을 떠도는 프로젝터 소리에 묻혀 버렸다. 새벽녘 미시간 호를 에워싸는 물안개 같은 은은한 연기가 무대 위로 퍼져 나갔다. 그 사이로 남자는 차박차박 물에 젖은 발소리를 내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반주 없는 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인형은 항상 춤을 추고 있었지.
남은 허상 속에서
의지 없이 짜인 틈새에서
춤을 추다가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어.

여자의 주위를 맴돌며 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여자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올려 느릿하게 키스했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의 감정은 복잡했다. 사랑, 연민, 애틋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가로질렀다. 남자가 노래를 멈춘 그 짧은 순간 관객들은 여자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아우러진 남자의 손짓, 표정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 고요한 사위 속으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꿈에서 깨어나길 항상 기다렸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버려서
이 현실에서, 이 허상에서 눈을 뜨면
다시 그 눈동자를 볼 수 있을까,
그 눈빛으로 다시 숨 쉴 수 있을까.

깨어나지 않는 그대는 잔인해.
이토록 내가 바라는데
깨어나기를 바라는데

제발, 다시 날 바라봐 줘.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자신의 감정을 노래로 승화시키는 남자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손이 간절하게 허공을 움켜잡더니 남자의 심장으로 다가갔다. 비틀거리던 두 다리가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졌다.

그 두 눈이 날 향했으면 해.
차라리 내 몸을 찢고 불태워 버려.
그럼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
연기가 되어 네게 흘러갈게.
그러니까…….

「제발…….」
남자가 힘겹게 내뱉은 마지막 말은, 노래가 아닌 중얼거림이었다. 남자는 두 팔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의 죽음. 그리고…….
인형은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스륵 일어났다. 여전히 잠에 취한 듯 새까맣게 물든 몽환적인 눈동자가 관객들을 향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담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스포트라이트와 영상이 훅 꺼지면서 시야가 어둠에 물들었다.
쏴아아…….
들리는 건, 귓가를 가득 울리는 아련한 바람 소리뿐.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희미해지며 완전히 사라졌을 때,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우레 같은 함성이 강당 안을 가득 매웠다. 감동이 물결치는 그 안에서 담조는 이상하게 박수를 따라 칠 수가 없었다. 불이 다시 밝혀진 후에도 남자와 손을 잡고 인사를 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살 기도, 그녀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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