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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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폴란드 국경과 접한 독일의 소도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에서 태어났다. 178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베를린의 위그노파(프랑스의 신교)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유서 깊은 군인 집안에서 클라이스트 또한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1799년에 그는 군인의 길을 포기한다. 클라이스트는 프랑스의 근대화, 나폴레옹군의 독일 지배, 프로이센의 개혁 등 “이런 변화무쌍한 시기”에 국가에 대한 의무, 가문과 신분에 의한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인간으로서의 행복, 인생의 목표를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클라이스트는 파혼까지 겪은 후 ‘위기의 작가’가 된다. 1807년 낭만주의자들과 협업한 예술잡지 ≪푀부스≫, 1810년 시사적인 신문 ≪베를린 석간≫의 편집자와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재정난은 가중되어 갔다. 드라마 작가, 단편 작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시도는 모두 실패와 좌절로 이어졌고, 삶의 방향과 목표를 상실한 클라이스트는 1811년 34세라는 나이에 베를린 근교의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과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0년 남짓한 창작 기간에 수편의 드라마와 소설을 썼지만 클라이스트 생전에 무대에 오른 작품은 <깨어진 항아리>뿐이었고 단편도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통해 발표되는 정도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클라이이스트의 작품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그가 남긴 8편의 단편과 8편의 드라마는 오늘날 독일어권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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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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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했으며, 뷔르츠부르크대학 및 마르부르크대학교 방문교수, 체코 카렐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1981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외국문학연구소장, 사범대학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의 시문학》(공저), 《추와 문학》(공저), 《프란츠 카프카. 인간·도시·작품》, 《표현주의 문학》이, 역서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메두사의 뗏목》, 《아침부터 자정까지》, 《병사 다나카》, 《구원받은 알키비아데스》, 《유대인 과부》, 《산호》, 《가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쟁》,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 프란츠 베르펠의 《거울인간》,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프리드리히 헤벨의 《니벨룽겐》, 슈테판 하임의 《6월의 5일간》, 《다윗 왕에 관한 보고서》, 일제 아이힝거의 《더 큰 희망》, 리온 포이히트방거의 《톨레도의 유대여인》, 《유대인 쥐스》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응용미학으로서의 드라마?실러의 《빌헬름 텔》 연구〉, 〈신화의 구도 속에 나타난 현재의 정치적 상황?보토 슈트라우스의 드라마 《균형》과 《이타카》를 중심으로〉, 〈최근 독일문학의 한 동향. 페터 슈나이더의 경우〉, 〈베스트셀러의 조건?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경우〉 외에 독일 표현주의 문학과 카프카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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