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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0024592
· 쪽수 : 402쪽
· 출판일 : 2017-11-16
책 소개
목차
2.
3.
4.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시우의 집은 주은의 집 바로 아래층이었다. 구조는 같았지만, 인테리어가 완전히 달라 다른 집처럼 느껴졌다. 그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듯, 인테리어 자체가 심플했다. 거실엔 2인용 검은색 소파와 테이블밖에 없다. 왠지 안방에도 침대 하나만 달랑 놓여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식탁은 있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주은이 식탁 위에 놓인 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우의 집엔 술이 종류별로 꽤 많았다. 맥주, 소주 같은 기본적인 술부터 난생처음 보는 와인과 양주까지 보였다. 주은의 아버지인 성태도 꽤나 주당이라 특이한 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웬만한 술은 다 본 적 있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미묘한 충격이었다.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몰라서요.”
시우가 이토록 많은 술을 꺼내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물어보지 그랬어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말해주면 되는데.”
“보고 고르는 게 나으니까요. 다른 것도 먹어보다 보면 맛있을 수도 있잖아요.”
시우가 냉장고에서 여러 종류의 치즈를 꺼내더니 과일, 건어물을 안주로 내어왔다. 식탁이 금세 한상 가득해졌다.
“새벽에 마시기엔 과하게 차린 게 아닐까 싶네요.”
“처음으로 함께하는 술자리인데, 대충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시우가 소맷자락을 걷으며 말했다. 낮이었으면 슈트로 갈아입고 올 기세였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앞에서 정성스럽게 움직이는 남자라니. 어떤 여자라도 빠지고 말 거다. 주은은 시우가 인기가 많은 이유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마셔요.”
시우가 와인 병을 들어 주은의 빈 잔에 부어주었다.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술을 따르는 시우의 자세는 완벽했다. 와인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한 몸가짐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행동은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은 듯 우아했다.
꽤 잘사는 집안의 자제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평범해 보이는 이 아파트는 이 구역에서 비싼 축에 속했다.
이런 아파트를 이렇게 꾸며놓고 혼자 산다는 건 잘산다는 뜻이 된다. 그러고 보면 시우의 옷들도 모두 명품이었다.
그래서 행동에 거침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어렸을 적부터 다 가지고 산 이들은 부족함을 모르고, 갖지 못한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인내와 절제를 배울지언정 끝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라난 그들에게는 물건이나 사람이나 별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원하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가졌다. 시우도 마찬가지인 게 아닐까.
주은은 와인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와인은 입맛에 맞아요?”
그가 테이블에 기대어 물어왔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한없이 따스했다.
“맛있어요.”
와인은 적당히 달았고, 또 적당히 떫었다. 주은이 딱 좋아하는 맛이었다.
“다행이네요.”
시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쪽은 안 마셔요?”
“하시우.”
“…….”
“그렇게 불러줘요. 편하게 시우 씨도 괜찮고, 더 편하게 시우야도 괜찮아요.”
“그래요. 나보다 어리다고 했으니까 편하게 시우라고 부를게요.”
“말도 편하게 놔요.”
“그래.”
주은이 선선히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 주은이 말을 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잔이 텅 비었다.
“오늘 우리가 술자리 가졌던 건 호성이한테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그럴게요. 하지만 주은 씨 통화를 들었던 일은 아직 완전히 비밀로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기억하죠?”
시우가 주은의 빈 술잔에 와인을 부으며 물었다. 주은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우가 식탁 위를 가득 채우는 동안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연달아 와인을 섞어 마신 탓인지 머리가 멍했다. 주은은 흔들리려는 제 몸에 억지로 힘을 준 채 허리를 곧게 폈다.
“어떻게 하면 비밀로 해줄 건데?”
주은이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물었다.
“왜 호성이한테는 비밀로 하려고 해요?”
시우가 되레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의 눈이 빛났다.
“호성이는 죄가 없으니까.”
주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엄마도, 태현도 결국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았지만 호성은 아니었다. 동생은 죄가 없었다. 그러니 굳이 이 고통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호성이한테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뭘 원해?”
“애인 자리요.”
“…….”
“그 자리, 다른 놈 말고 나한테 줘요.”
“…….”
“누구보다 잘할 테니까.”
시우의 입꼬리가 야하게 말려올라갔다. 작정하고 유혹하기로 한 양 그의 눈빛이 나른해졌다. 남자가 야할 수도 있구나. 주은은 멍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애인이라…….
주은이 속으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윤정과 뒤엉켜 있던 태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는 것 말고는 흔한 뽀뽀조차 한 적 없었다. 그땐 그가 예의 바르고 정중하며 진중한 성격이라 그런 거라 생각했다. 실은 자신은 꺾고 싶지조차 않은 꽃이었던 거지만.
“난, 너한테 야한 꽃일까?”
주은이 멍한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야한 꽃이죠. 매순간 사람 미치게 만드는.”
시우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순간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온몸을 누르는 무게를 느끼며 주은은 시우를 바라보았다. 아주 멀리 서서 마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바짝 가까이 붙어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오래전에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던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분위기 탓일까,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럼 꺾어봐,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