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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30803968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5-04-19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고라니 발자국
방아깨비 산조
수수밭 지나는 바람
체리는 어떻게 익는가
초연기(蕉戀記)―파초의 사랑
국수 국물, 그 맛
맨드라미
뽕나무를 두고 시를 쓰려는 불온한 의도에 대하여
페치카가 있는 집
영각을 하는 기계와 더불어
적멸(寂滅)의 종소리
작가의 소설론:본전 건지는 소설 읽기에 대하여
저자소개
책속에서
책머리에:흙장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인간의 장난 가운데 불장난, 물장난, 흙장난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 불장난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고 코카서스 산 바위 위에 붙들어매고 간을 독수리에게 쪼이게 했다는 프로메테우스가 그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물장난은 노아의 방주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흙장난은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어서 숨을 불어넣어 살게 했다는 창조신화와 연관된다. 흙장난은 신의 장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무모한 도모를 포괄해 보여준다. 내가 나를 가지고 장난하는 게 흙장난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런 난처한 질문을 받는다.
“요즈음도 소설 팔려요?”
나는 한참 멈칫거리다가 대답이라고 한다는 꼴이 이렇다.
“여전히, 소설밭이나 갈아엎는다오.”
내게 소설밭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이다. 하나는 말밭[語田]을 매만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살아가는 세상을 들춰보는 일이다. 소설밭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대개 글쓰기가 그렇듯, 손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가하게 손을 놀게 놔두어선 안된다. 내 손에는 가끔 흙이 묻어 있었고, 손마디는 나뭇가지처럼 굵직굵직하게 부풀어 올랐다. 손바닥에는 군살이 박혀 딱딱하다.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소설을 써서 도무지 무얼 얻소?”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난감해한다. 소설밭은 말밭은 그것도 말밭인지라, 그걸 갈아엎기 위해서는 농장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학교라는 데를 다녔다. 학교는 말을 살리기도 하고 말을 질식하게 하기도 했다. 신선한 언어를 위해서는 학교보다는 들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들판은 거친 바람이 날뛰고 눈비가 지쳐 지나갔다. 허나 그러나 그 들판 말고는 더 이상 발을 내어 디딜 데가 바이 없었다. 나는 결국 말의 농사꾼이었다. 말을 다루는 것도 결국 밭일 즉 흙장난인 셈이다.
밭을 깊이 갈아야 곡식이 잘 자라고 과수가 실하게 가지를 뻗었다. 때로는 바람이 불어 자라던 곡식을 짓이겨놓고 나뭇가지를 꺾었다. 가지 꺾인 나무가 새 잎을 내는 동안 나는 들들 앓았다. 앓다가 털고 일어나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다시 주저앉아 깨지고 터지고 하는 중에, 제법 밭일에 익숙해졌다는 오기가 생길 무렵, 사람들은 제법 달콤한 말로 나를 잘한다고 부추기기도 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런 인사는 귀신이나 받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귀신이 되어 인사받기가 싫어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풀이 눕고는 일어나지 못하는 강언덕에 알몸으로 서 있곤 했다. 살점이 거위 깃털처럼 피어서 날아갔다. 그리고는 하얀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나는 앙상한 뼈를 이끌고 강물로 들어가 몸을 눕혔다. 하늘이 슬금슬금 내려와 몸이 파랗게 물이 들고, 잎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사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강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살진 암소가 지나가다가 입을 벌리고 나뭇가지를 휘어 잎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나는 몸이 간지러워 강언덕에서 겅중겅중 뛰었다. 가지에서 꽃이 벌고 열매가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어느 사이에 한 그루 나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육신의 몸으로 부딪쳐가며 아우성대는 훤잡(喧雜)의 골짜기를 떠나는 일이었다. 육신을 지닌 내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은유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뜻이었다. 은유는 내게 유령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시(詩)를 무서워한다.
관념의 쇳덩어리가 머리를 짓누를 때면 나는 밖으로 나돈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풋풋했고, 또 싱그러웠다. 그리고 이따금 그들은 어떤 장난들을 하며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그 땅에서 불을 지펴보아야 하고, 물을 다뤄보아야 조그만 꼬투리를 잡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시 안으로, 내 땅으로 돌어와 다른 흙장난을 시작한다.
여기 『초연기―파초의 사랑』에 모은 작품들은 내가 손에 흙 묻히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얻은 것들이다. 흙을 딛고 서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꽃향기가 햇살을 받아 남실거리는 강물로 배어드는 이야기들이다.
소설이라고 이름을 달기는 했지만, 이거 아무개 이야기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고개를 갸웃할 구석도 없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지어낸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실감이 난다면 작가는 감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