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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30817675
· 쪽수 : 216쪽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구운 감자
막차를 타고 / 원조 조카바보 / 그 말, 한마디 / 가끔 속아주는 아량도 / 구운 감자 / 연필 세 자루 / 삼촌, 또 노름하러 가? / 뱀, 먹을 수 있어? / 새끼돼지 / 싸움대장
제2부 저 하늘의 별이라도
탁상시계 / 개구리와 미꾸라지 / 저 하늘의 별이라도 / 뭐가 돼도 될 아이 / 무엇에 홀린 듯 / 고추장 한 항아리 / 턱수염과 다리털 / 자존심을 닮았다 / 행랑채 / 깎은 밤같이
제3부 무슨 꿈이 있었을까
산비탈 따비밭 / 허세일까, 배짱일까 / 혼수이불 보따리 / 남긴 밥, 한 숟가락 / 무슨 꿈이 있었을까 / 맞선 보던 날 / 형부 눈이 빨개서 / 제일 많이 웃은 때 / 작은엄마와 존댓말 / 장터에서
제4부 따사로운 햇볕으로
풀잎의 이슬 / 손자국 / 그, 하나밖에 없는 친구 / 바람 불고 추운 세상에서 / 따사로운 햇볕으로 / 또, 이별 / 막연한 기다림 / 나들이 / 목숨 값으로 산 땅 / 기억의 문을 열면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려운 살림을 일으켜보려고 삼촌은 무던히 애를 썼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다. 남의 땅을 소작하는 것만으로 우리 식구 식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삼촌은 서울로 올라가곤 했다. 설을 쇠러 집으로 내려왔다가 설 지나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봄이 되면 내려와 농사를 지을 때가 있었고, 아예 그대로 집에 있다가 농사철이 되면 담배농사에 전념할 때도 있었다.
설 전날 집으로 온 삼촌이 개선장군처럼 서울 이야기를 하면, 나는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 때문에 장가를 못 가는 것 같아 어린 소견에도 미안했다. 삼촌이 서울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막노동이나 아는 사람이 하는 가게에서 일을 좀 하지 않았을까. 그 또한 신통치 않아서 어느 때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다가 설 전날에야 돈 몇 푼 구해 우리들의 설빔을 사 들고 내려왔을 것 같다. 그러니 자연 막차를 탈 수밖에. 삼촌에게 들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조합하여 짐작해보면 그렇다. 온 식구의 입과 마음이 자신에게 매여 있다는 그 책임감이 삶을 얼마나 지난하게 했을까. (「막차를 타고」)
삼촌이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들의 연필을 깎아주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 그게 조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식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일까. 그때의 사람들은 사랑 표현을 잘 안했던 것 같다. 예뻐도 빙긋 웃으며 머리 쓰다듬어주는 게 다였고. 그래서 삼촌과 특별히 나눈 이야기가 많지 않다. 툭툭 한마디씩 던졌던 말은 있지만.
내가 연필을 스스로 깎아 쓰게 된 것은 5학년쯤부터였다. 농사가 끝나면 삼촌이 객지로 나가는 바람에 동생들 연필도 내가 거의 깎아주었다. 그때 나도 삼촌이 했던 말을 동생들에게 그대로 했다. 맘대로 연필 깎지 마, 손 다쳐, 라고. 연필깎이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교생 중에도 그것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삼촌은 가지런하게 깎은 연필을 필통에 넣어주면서, 우리들이 연필처럼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연필 세 자루」)
일자 형 초가집에 방 두 칸, 나중에 직접 벽돌을 찍어 지은 행랑채, 신식 화장실, 자그마한 안마당, 한쪽에 비스듬히 누운 사립문, 나지막한 토담, 뒤란의 싸리나무 울타리,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던 황매화, 앵두나무 두 그루, 골담초, 건조실 두 개, 장독대, 옆에 피던 달리아와 백합, 작은 화단. 우리 삼촌과 여섯 식구가 오순도순 살던 옛날 우리 집이다.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그 기억의 문을 열면, 삼촌이 감자를 구워 들고 건조실 아궁이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흐흣 웃으며. 동생들은 정신없이 뛰고 내달리며 시시덕거리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부엌과 뒤란에서 달그락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달리아와 채송화가 분꽃과 함께 우리 식구들 웃음처럼 피어나고. 옆집 감나무에 매미 소리 시원스럽고……. 삼촌, 당신이 있어 따뜻했던 날들. (「기억의 문을 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