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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국내 BL
· ISBN : 9791131567814
· 쪽수 : 704쪽
· 출판일 : 2015-09-23
책 소개
목차
1권
0장. 꿈과 희망
1장. 사랑은 증오로부터
2장. 꽃도 많고 재주도 많고 비밀도 많다
3장. 러브송은 증오하듯이
4장. 다칠 준비가 돼 있어
5장. 피어나(Bloom)
6장. Excuse Me Miss
2권
7장. Lean On Me
8장. 썸 Some
9장. Last Romeo
10장. Be Be Your Love
11장. 봉숙이
12장. Only ONE
저자소개
책속에서
“혹시, 박희삭 아니에요? 예전에 S 엔터테인먼트의 유망주였던―”
희삭은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미 냄새를 맡은 기자가 그를 졸졸졸 따라왔다.
“아직도 S 엔터테인먼트 소속입니까? 네? 박희삭 씨! 안 그래도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그때, 이리나가…….”
이리나가 언급되는 순간 희삭은 기자를 냉담히 쏘아보았다.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따로 만나죠. 여기 제 명함 있어요. 연락 좀 줘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간절하겠죠? 그렇다면 나랑 커피 한잔하는 게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희삭을 꾀어내려는 기자의 속셈은 달콤했고 독을 품고 있었다. 비겁하다고 불평을 해 봐야 상대에게는 약점을 잡을 빌미를 줄 뿐이었다. 난처해진 희삭은 예숙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절실한 마음으로 구원을 바랐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었다. 삭막하면서도 뜨거운, 마치 사우나 같은 연예계에서 울고 있는 바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같은 바보뿐이었다. 그리고 영웅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서 명함 받아요. 싫으면 여기서 이야길 좀 더 해 봐도 좋고.”
그때, 희삭의 머리 위에서 다섯 번째 손가락이 없는 커다란 손이 쑥 튀어나오더니 명함을 가로채 갔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것에 기자는 겁을 먹었다.
“내 연예인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홍보부를 통해 주시기 바랍니다.”
희삭은 뜻 모르게 뺨을 붉힌 채, 류를 보았다. 그가 한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 연예인이라니, 뭘 의미하는 것일까? 비슷한 생각을 기자도 했는지 그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친구, 우리 J 엔터테인먼트 소속이 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내 눈에 안 띄게 저쪽으로 가세요. 저기 기자들 몰려 있는 데요. 가서, 이주인 사진이나 한 장 더 건지는 걸로.”
‘내’ 연예인이라는 표현에서 은어처럼 살아 날뛰던 소유격은 어느새 ‘우리’로 바뀌어 있었다. ‘내’보다 ‘우리’ 쪽이 훨씬 더 큰 개념이고 가족 같은 뉘앙스를 풍김에도 불구하고, 류가 말하는 ‘우리’는 딱딱하기만 했다.
“여자는 내버려 두고 날 따라와.”
류는 손가락 없는 쪽의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경직된 분위기에서 마법처럼 풀려난 희삭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종종걸음으로 쫓는데도 불구하고 류는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렇게 거침없이 가다간 낭패를 볼 텐데. 희삭은 걱정이 들었다. 주유소 뒤쪽에는 성질 사나운 진돗개가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희삭에게도 가끔 으르렁거리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진돗개는 류를 보자마자 자세를 낮추고 꼬리를 흔들었다. 어이가 없어진 희삭은 그만 가던 길을 멈추고 진돗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씨구? 이제는 몸을 뒤집더니 아예 배를 까고 있었다.
“그렇게 굼떠서 사장이 좋아하나?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진돗개의 턱을 긁어 주던 류가 냉랭히 쏘아붙였다. 그의 카리스마에 이미 단련된 희삭이었기에 언행보다는 진돗개의 배신이 더 놀라웠다. 아무리 개가 사람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르다지만 근 3년째 알고 지낸 사이에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친절을 베푸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또 왜 여기 계시는 지도 솔직히 이해가 안 되지만 말이죠. 하하…….”
일단 곤경에서 벗어났으니 흔쾌히 감사 인사를 하는 희삭이었다. 하지만 류는 납득이 안 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널 왜 구해.”
“그러게요. 저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게요. 일단 그쪽이 왜 여기 계시는지도 불가사의고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엊그제 절 개무시 하셨잖아요? 그래 놓고 왜 도와주셨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참 희안한 분 다 보겠네 싶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합니다.”
오디션장에서처럼 또다시 말이 많아지려 해, 희삭은 무심코 주먹으로 입술을 때렸다. 유독 저 남자 앞에서는 만담가가 되는 것 같았다. 역시 개그맨 발언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난 암시에 잘 걸리는 체질인가? 희삭은 새삼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몸부림쳤다.
“추태를 보면서도 말려 주지 않는 정의로운 분이군요. 절 구해 주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몸을 배배 꼬던 희삭이 더 이상 뒤틀 근육이 없어지자, 민망함에 류를 탓했다. 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희삭을 주시했다.
“같은 개그맨이라도 애드립 한 마디라도 더 잘 칠 놈이 널렸을 텐데……. 연봉 3억 받는 기획실장 처지에 했던 말을 도로 물릴 수도 없고…… 새삼 후회되는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심지어 가는귀가 어둡기까지. 못 알아들었냐? 지금 널 J 기획사에 친히 넣어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잖아.”
“전 부탁한 적 없는데요?”
“네 입장을 생각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감사하게 받아도 꿈인지 생신지 구분 못 할 입장 아닐까?”
“저는 그런 입장 아닌데요.”
할 말은 확실하게 하는 희삭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류를 믿을 수가 없었고 두 번째로는 실력으로 연예인이 되자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었다.
“연습생 생활 하느라 학교 진학을 못 해서 주제 파악에 어려움을 느끼는 모양인데 똑바로 알아 둬. 넌 그런 입장이야.”
류는 속사포처럼 쏟아 냈듯이 거침없게 자신의 명함을 주었다.
“내일부터 연습실로 나와. 배울 게 한두 개가 아니야, 지금.”
“누, 누가 간대요?”
눈빛 하나로 희삭의 반발을 차단한 류는 담벼락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빌어먹을. 역시 최희효가 납셨군. 뭐야, 김이완도 같이 왔잖아? 빨리 정리하고들 떠날 것이지 왜 저렇게 말들이 많아.”
주인의 존재 따위는 완전히 묵살하는 류였다. 희삭은 속으로 조금 통쾌함을 느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남들이 알면 귀찮아져. 특히 저 둘은 피곤해. 세트로 다니는 게 곧 뭔 일 낼 것 같아.”
왠지 알 것 같았다. 희효는 S 엔터테인먼트의 이사이니 최고 경쟁사인 J에 근무하는 류로서는 조금 번거로운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이완은 어째서일까? 류는 그에게 오히려 잘 보여야 하는, 또 가깝게 지내야 하는 입장 아닌가? 한데 류는 희효보다도 이완을 더 껄끄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뭐해? 받아서 주머니에 넣어! 누가 보기 전에!”
명함을 안 받으면 입 속에 억지로 쑤셔 넣어 줄 분위기였다. 한때 J 기획사의 식구가 되어 J 엔터테인먼트 직원 식당에서 그들과 한솥밥을 먹고 싶다 생각한 적 있는 희삭이었지만 저렇게 무서운 기획실장이 있는 이상은 죽을 먹어도 체할 것 같았다.
희삭은 일단 명함을 받은 다음, 나중에 진돗개 똥을 치울 때 섞어서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아까 일어난 일은 그냥 친절이라고 믿으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지만 류의 살기 어린 눈빛에 괜히 한 짓임을 확인받았을 뿐이었다.
“제길. 왜 안 가는 거야. 기자회견 잡았어? 중국 진출 알려?”
“저, 개구멍…….”
“뭐?”
초조해하는 류에게 희삭이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개구멍…… 알려드릴까요?”
‘내가 개구멍 따위로 다닐 것 같냐’는 표정으로, 류가 그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