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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5413469
· 쪽수 : 544쪽
· 출판일 : 2019-01-29
책 소개
목차
0. +5 혹은 -5
1. 글레이징
2. 맥박을 끌어안는다는 것
3. 지난 흔적
4. 그해 여름
5. 좋아하게 된 이유
6. 연애,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
7. 질투
8. 떠오르다
9. 균열
10. 맞잡은 손의 온기
11.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외전. 여전히 좋아해서
작가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차피 결혼할 거면 같이 살 거니까 두 달 일찍 들어가도 문제없잖아.”
“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같이 사는 건 좀 아니야? 나랑 같이 있는 건 좋은데 같이 사는 건 부담스러워?”
“그게, 부담스럽긴 한데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랄까…….”
결혼한다는 실감은커녕 연애 중이란 실감도 안 나는데 동거라니. 진도를 몇 단계를 건너뛴 거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막 떨렸다. 그러나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선배는 어둠 속에서 낮아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래? 네가 좋아하는 남자?”
“네? 아뇨, 그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선배라고요.
선배가 자꾸 신경 쓰는 게 마음에 걸려서라도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 한들, 선배가 그 말을 믿어 줄까?
굳이 가정하자면 이건 선배의 첫사랑이 사실은 나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선배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그걸 믿을 수 있을까? 당연히 못 믿을 거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봐서 다시 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일단 선배의 불안부터 달래 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저는 이제 선배랑 결혼하잖아요. 제가 기억 잃은 거 때문에 불안하면, 기억 얼른 되찾을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나랑 정말 결혼해도 괜찮겠어?”
선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나는 말을 잘렸다는 사실보다도 그 내용에 놀라서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그런데 내 침묵을 선배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이해하니까.”
선배가 보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어두워서 선배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선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선배를 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선배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내가 욕심을 부렸어. 너한테 선택권을 주는 게 맞는데, 그러면 네가 싫다고 할 거 같아서 그냥 밀어붙인 거야. 네가 지금 나를 거절하고 떠나면 그대로 끝일 것 같아서……. 다신 나한테 안 돌아올 것 같아서.”
“선배…….”
“그런데 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네 뜻을 존중해 주겠다고 말을 못 하겠어.”
이불 위로 드러난 내 손 위로 희미한 온기가 닿아 왔다. 경계심 많은 아기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다가온 그 온기는 내 손가락 끝을 살짝 감싸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에서 선배의 불안이 느껴졌다.
나는 선배가 5년이나 사귄 사람이자 이제 두 달 뒤면 결혼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손조차 함부로 잡지 못하고 있는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물어볼게. 네 진심은 어때?”
“제가 무르자고 하면 무를 거예요?”
불쑥 튀어 나간 질문에 선배가 날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윽고 선배가 작게 웃었다.
내가 그 의미를 헤아릴 새도 없이 선배의 입이 열렸다.
“네가 진심으로 그걸 원한다면.”
선배는 나를 배려하고 있는데, 왜 가슴 한편이 따끔거리는 걸까.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 했다. 나는 이유 없이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며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 손가락 끝이 스치듯 부딪쳤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선배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얽었다. 움찔해서 뒤로 물러나려는 움직임을 강하게 붙들었다.
“저는 선배가 좋아요.”
순간 선배가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나도 함께 숨을 죽이며 이어서 말했다.
“제가 잃은 건 기억이지 감정이 아니잖아요. 기억이 없어도, 선배가 좋아요. 만약에 안 그랬으면 선배가 너 나랑 결혼해야 된다고 밀어붙이든 말든 전 이 병원 뛰쳐나가서라도 도망갔을 거예요.”
“도망…….”
“안 간다니까요. 할 거예요, 결혼. 선배랑.”
그리고 반쯤은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같이 가요, 신혼집. 어차피 결혼할 거니까.”
“……진짜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거 뭐 있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기억 돌아올지 누가 알아요?”
“응…… 그러네.”
선배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터졌다.
선배를 저렇게 웃게 만든 사람이 나라니. 죄책감이 마구 피어올랐다. 동시에 느껴지는 책임감에 부러 다부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기억 없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저 진짜 선배 좋아한다니까요? 여기서 더 좋아할 수 있게 노력할게요.”
“응. ……고마워.”
선배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부드러운 온기와 함께.
직후 내려앉는 따뜻한 숨결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선배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