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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41601249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24-09-25
책 소개
목차
압구정동
대성리
뉴욕
밤섬
한강
녹두거리
성수동
올림픽대로
빛으로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강재웅은 유연지를 잊지 않았다. 그저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연지와 다시 만나는 순간에 대한 조화롭고 완벽한 과정의 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수천만 번이나 재현되고 발전한 나머지 그 상상의 장면은 허공 속에서 쓰다듬은 수천만 번의 손길에 의해 매끄럽게 다듬어진 하나의 단단한 대리석 조각상이 되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실물이나 다름없이 확실해진 그 석상을 오른쪽과 왼쪽, 위쪽과 아래쪽에서 모든 각도로 지켜보고 만질 수 있었다. 집착조차 오래전에 잊었다는 듯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는 그 재회의 장면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이 순간까지 신화적인 인생의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디뎌왔음을 분명히 암시했다.
“저기 살아? 저기가 재웅이네 집이란 말이야?”
“저기 꼭대기 층이에요.”
에클바이오와 에클코인을 거쳐 T타워에 이르는 그 믿을 수 없이 비인간적인 역정을 손가락을 다 펼 필요도 없이 가벼운 손짓으로 요약하기 위해, 그처럼 대수롭지 않게 연지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재웅은 이날까지 살아왔다. 하나도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위장하기 위해, 그리고 그 순간 필연적으로 연지의 얼굴에 스칠 망설임을 무마하기 위해, 재웅은 유러피안 앤티크 가구와 케이크와 티 세트와, 그리고 킹스포인트와 나까지, 아마도 공들여 준비했을 것이다.
재웅은 말하지 않고도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을 몰아가는 힘이 있었다. 신입생으로 동아리의 막내였을 때에도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에게 신경을 썼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했고 무엇을 원할지 짐작하려 애썼다. 그가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아도 일은 그의 생각대로, 아니 우리가 그의 생각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대로 흘러가곤 했다. 그가 입을 열어 자기 생각을 명확히 밝힌다면, 반론이 따를 때도 있긴 했지만 거의 반드시 그대로 되었다. 그가 가진 신기한 힘이었다. 떠밀려 강요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그의 생각대로 움직였던 그때처럼 지금도 그 자장을 강력하게 느꼈다. 사람의 신경 물질 전달 과정에 ‘반드시’라는 이름을 가진 수용체가 있다면, 재웅은 정확하게 그 수용체를 자극하는 어떤 페로몬을 폭발적으로 분비했다. 재웅은 내가 연지와 그 사이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왠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