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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1468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4-03-10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교실은 차분하니 정적이 감돌았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민우는 연습장에 수학문제를 풀고 있지만, 정녕 무엇을 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기계적으로 손이 써내려가는 대로 적고 있었다.
“야! 차민우. 너 요즘 왜 그래?”
재형은 민우의 딱딱하게 경직된 모습을 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민우는 여전히 써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책상에 엎드려있던 재형은 바짝 민우 곁에 다가앉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런 농담으로라도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너, 이슬이 몰래 바람피냐? 이슬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공부나 해.”
무시하듯 민우가 말했다.
“공부한다고 갑자기 성적이 올라 가냐? 그건 그렇고 너 무슨 이유로 야간자율학습하자고 했냐?”
“이제 슬슬 마무리 해야지. 이유는 무슨…….”
민우가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교대로 감독을 도는 선생님들 중에 국어 교사인 지영이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유치하고 치졸했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남아서 자율학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 말이다.
민우는 지금까지 어떠한 조건에서도 치기어린 반항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란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최근 들어 실감했다. 지영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이성도 사고도 모두 마비된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민우는 연약하면서도 날것이어서 더욱 날카로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촉각을 세웠다. 온 신경이 그녀를 향해 촉수를 뻗어나갔다.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두려웠다. 맹목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감정 앞에서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깜깜한 창밖을 향해 의미 없는 시선을 두던 민우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친놈. 뒤 늦게 사춘기냐…….”
재형은 밖으로 나가는 민우를 향해 혼잣말을 했다.
당직 선생만 남아 있는 지금은 교정 어디에서 담배를 피우더라도 안전했다. 본관 뒤편 소각장 옆으로 간 민우는 작은 화단에 앉아서 담배를 꺼냈다. 주황색 불꽃이 어둠에 그늘져있던 민우의 얼굴을 잠시 드러냈다. 민우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가슴 깊숙이 빨아 당기자 매캐한 연기가 스며들었다. 점점 타들어가던 담배는 뼛가루처럼 허연 재를 매달고 있었다. 손끝으로 툭하고 치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민우는 흠칫 굳어졌다.
머리로 인식하기 전 몸이 반응을 해왔다. 오직 그녀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신경. 무의식 속으로 파고든 것 마냥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제 몸들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어둠을 가르며 걸어오는 누군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맹렬히 살아나는 세포들이 말했다.
그녀라고.
“거기 누구니?”
그녀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귓가에 파고들 듯 스며들어 심장을 두드려댔다.
민우는 담배를 끌 생각도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민우의 두 눈은 어둠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지영은 손에 들린 담배를 뺏어서 바닥에 던져버린 뒤 발로 밟아서 불씨를 껐다.
지영은 말없이 서 있는 그를 보며 소리쳤다.
“학생,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담배 피우면 안 되는 거 몰라? 어쩐지. 이곳으로 오고 싶더라니.”
잔소리를 하던 지영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남학생이 누구인지 알아버렸다. 커다란 눈망울이 놀란 듯 더욱 커다래졌다.
“… 차……민우……?”
“이제야 알아보신 건가요?”
“…… 아, 아무리 힘들어도 담배는 안 돼.”
지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우의 굳어진 시선이 꽂혀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새카만 눈동자는 더욱 더 깊이 파고드는 듯 했다. 지영은 흠칫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민우에겐 그 한 발자국이 아무리 발광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확인해야 해. 정말 닿을 수 없는지를…….
민우는 팔을 천천히 그녀를 향해 뻗었다. 뭔가 위협적인 행동으로 느껴진 지영은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서려는 순간 그의 손에 붙잡혔다.
“……놔!”
“이젠 잡혔으니, 안 놓을 거야…….”
“!”
“다른 녀석들처럼 누가 국어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나도 국어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잠시 스쳐갈 감정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여쁜 국어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민우의 말이 적막한 밤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지영은 두려웠다. 그저 이 자리를 떠나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던 민우는 그렇게 뜻 모를 말을 내뱉고서는 홱 하니 사라졌다.
지영은 방금 그가 던진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도 전에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교무실로 들어온 지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잡았던 팔은 아직도 욱신거렸다. 단단한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움켜잡았을 때 알 수 없는 낭패감이 밀려들었었다.
“뭐야…… 차민우…….”
처음부터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짙은 눈빛을 알고 있었다. 그 눈빛이 두려워 본능적으로 그를 피해왔었다. 난감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피곤해졌다. 아득하게 정신을 휘발시켜버릴 것 같은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았다. 외면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쓴다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