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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1895
· 쪽수 : 376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 잊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2. 집으로 이끄는 이정표
3. 오랜 인연
4. 이별을 낳은 불신
5. 늦은 재회
6. 불안한 예감
7. 슬픈 분노
8. 다시 설레는 심장
9. 해결의 실마리
10. 사랑, 뒤늦은 깨달음
11. 용기를 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
12. 마침내 시작된 소소한 일상
에필로그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의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오랜 촬영으로 자리를 비웠지만 그녀가 그렇게 떠나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돌아와서도 희라의 어머니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결혼했고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당시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희라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겠는가.
현성은 그녀에게 기다리라고 했고, 그녀라면 당연히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간절함은 매캐한 냄새를 내며 사그라지는 폭죽보다 더 빨리 소진되었다.
그날 희라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창백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에는 약간의 공허함이 감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온통 야위었는데, 그래서 더 동그마니 올라온 그녀의 배가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녀를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현성은 온몸에서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얼을 빼놓고 있었는지 몰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늘에서 폭죽이 요란하게 터졌다. 사위는 깜깜한 절벽보다 더 어두웠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다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것이 자신의 심장이 아니라 검은 하늘을 공허하게 수를 놓고 있는 화려하기만 한 불꽃이 내는 소리인 것을 자각한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그날 이후 현성의 심장에서는 수시로 폭죽이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터졌다.
오늘도 어김없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뭔가 달랐다. 그 커다란 소리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도는 동안에도 그의 단전 아래에 모여 있는 열망이라는 것이, 일말의 기대라는 것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기억해낸 현성의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희라는 기억하던 것보다 더 부드러웠고, 더 야들야들했다.
그가 평생을 걸쳐서라도 잊고자 했던 그 감각들이 손끝에서 되살아나 현성을 희롱했다. 지우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지울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완벽히 지웠다고 믿었는데, 그의 본능은 여전히 맹렬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렇게 또 다른 의미로 그의 심장에 폭죽이 터졌다. 이렇게 폭죽이 터지는 심장으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온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은 현성은 자신의 커다란 몸뚱어리 아래에서 떨던 그녀를 떠올려 보았다.
부러질 듯 나약하기만 한 희라를 떠올린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한때 현성은 그녀의 불행을 빌고 또 빌었다. 사랑하니까 그녀의 행복을 기꺼이 빌어줄 만큼 그의 그릇은 크지 않았다. 현성은 진심으로 희라가 자신을 떠나 불행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보다 더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아 화가 났다.
돌이켜 보면 한때 그녀는 현성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이어도 보호해주고 싶었고, 어떤 상황이 와도 품고 싶었다.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육신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고 소중하기만 했던 유일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의 불행을 현성은 한때나마 간절히 빌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랬었다는 그 사실마저도 그의 부아를 돋우었다. 마치 지금 창백하고 나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든 것이 꼭 자신의 그 간절함 때문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