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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6627241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4-11-15
책 소개
목차
미메시스
눈사람, 시작
뽀삐
유진이
파지(把持)
가위
기일
귀신의 왕
난청
이웃사촌
아궁의 시
꽃무릇
진상들
재와 물고기
에테르포클록스카프
강요배
문학기행
불면
노안
트레바리
카르마
매미
Pedrolino
壎
미메시스
시인 노트
시인 에세이
발문│시인의 명경_정우신
김안에 대하여
저자소개
책속에서
한 승려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으므로 나는 따랐다. 이윽고 승려의 몸은 사라지고 불이 저 혼자 허기에 몸부림치며 걷고 있었다. 불에게는 눈이 없으므로, 허나 불에게는 길고 거대한 팔이 있으므로, 허기진 불은 사방을 향해 성난 붉은 원숭이처럼 제 팔을 휘둘렀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충동은 지난밤 꿈에서 황금빛 옥수수밭 사이를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시체를 안아주려 했던 것과 비슷했다. 가여운 것, 허기진 것, 끝없는 거대한 어둠이 너를 보고 있구나. 이렇게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영영 뜨지 못할 거야. 나는 시체에게 말을 건넸다. 설득하려는 듯. 누구를? 시체를. 꿈이었으니까. 죽지 말자고.
_「미메시스」 중에서
며칠 동안 폭우다. 나는 물에 떠오르는 온갖 것의 이름을 생각하며 누워 있다. 새싹 종이 나무젓가락 볼펜 옷 머리카락 눈동자 썩은 나무뿌리 마음. 가끔 창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_「이웃사촌」 중에서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골목이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는 점점 더 젊어지고 있었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골목은 내가 낯선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골목이야. 골목 바깥은 햇살이 눈부신데, 안쪽에서는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_「귀신의 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