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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영화/드라마 > 영화사
· ISBN : 9791158485795
· 쪽수 : 472쪽
· 출판일 : 2020-04-27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 01. 조선영화란 무엇인가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조선영화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근대
일본영화·일본영화인과의 관계
조선영화 발굴과 연구 동향
이 책의 방향
# 02. 활동사진의 도래
첫 활동사진 공개
극장가 형성
일본인 주도의 영화 흥행
조선인 영화관 등장
무성영화의 목소리, 변사
# 03. 조선영화의 출발(1919~1922년)
1. 서구 연속영화의 유행
2. 조선인 연쇄극 제작
일본에서 기원한 연쇄극
단성사 주도의 연쇄극 제작
3. ‘영화적인’ 연쇄극
영화적(cinematic) 실천으로서의 연쇄극
서구 활극의 미장센과 일본 신파 서사의 결합
# 04. 무성영화의 제작(1923~1925년)
1. 신파영화의 시대
초기 무성영화계
첫 상업극영화
2. 재조선 일본인 제작사
동아문화협회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
3. 조선영화인의 형성
4. 영화극으로서의 표현방법
무대극에서 영화극으로
화면의 연락
클로즈업/대사(大寫)
5. 일본 신파와 서구 활극이 직조된 스타일
일본 신파영화의 조선적 번안
서구 활극과 블루버드 영화의 영향
# 05. 무성영화의 질적 전환(1926~1934년)
1. <아리랑> 전후 무성영화계
2. 일본인 제작사와 조선영화인의 협업
조선키네마프로덕션
덕영프로덕션
대륙키네마프로덕션
경성촬영소의 원산프로덕션
3. 서구영화와 접속한 <아리랑>
<아리랑> 속의 <카추샤>
유럽 예술영화 사조의 영향
서구 활극 장르의 영향
4.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일
시나리오와 촬영대본 분석
<청춘의 십자로>로 본 무성영화 스타일
일본영화 스타일과의 접점
5. 발굴된 조선영화 분석
<청춘의 십자로>(1934)
# 06. 발성영화와 영화기업화의 모색(1935~1939년)
1. 발성영화의 시대
서구 토키의 수용
외국영화 상영 제한
2. 조선어 토키 제작
경성촬영소의 ‘협업(協業) 시스템’
조선인 자본의 한양영화사
3. 2세대 조선영화인
일본 영화촬영소 유학파
무성에서 발성으로, 스타일의 변화
4. 조선인 영화기업의 등장
<나그네/다비지>가 촉발시킨 일본영화 합작
최남주의 조선영화주식회사
이창용의 고려영화주식회사
조선영화 이출(移出)과 일본 수용
5. 발굴된 조선영화 분석
<미몽>(1936)
<심청>(1937)
<군용열차>(1938)
<어화>(1938)
<국기 아래 나는 죽으리>(1939)
# 07. 조선영화의 전시체제(1940~1945년)
1. 조선영화의 새로운 국면
조선영화령과 영화신체제
전시체제 개편과 영화계
문화영화 제작
경성의 영화흥행
2. 조선영화에서 국책영화로
식민지/제국의 조선영화
조일 영화계의 교류
최인규의 영화
국책영화 제작 시스템
3. 발굴된 조선영화 분석
<수업료>(1940)
<집 없는 천사>(1941)
<지원병>(1941)
<반도의 봄>(1941)
<그대와 나>(1941)
<망루의 결사대>(1943)
<조선해협>(1943)
<젊은 모습>(1943)
<병정님>(1944)
<사랑과 맹세>(1945)
맺는 말
註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조선영화는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는 구체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보자. 이는 조선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면면은 어떠했으며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가의 문제이고, 엄혹한 일제 강점 치하에서 왜 굳이 영화를 만들었나 하는 의문까지 포함될 것이다. 또한 영화 필름 그 자체로 보자면, 조선영화 텍스트는 기술적으로 또 문법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하는 질문까지 확장될 수 있다. 조선영화는 영화 매체의 특성상 허구의 세계일 수 있지만 식민지적 현실을 투영해낸 결과이기도 하고, 나아가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반영해낸 산물이기도 하다.
-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중에서
이경손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를 시작한 나운규는, 연출의 기회가 오자 ‘신파영화’라는 선배의 길을 따르면서도 할리우드 활극영화의 스타일을 상업적 돌파구로 지목했다. 당시 조선 관객들은 화려한 볼거리와 물량 공세, 또 스케일이 큰 액션 장면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할리우드 대작영화에 열광했고, 이에 익숙해지면서 영화의 감식안도 높아져갔다. 나운규는 이러한 조선인 관객들의 취향을 포착하고 어떻게 하면 서구식의 활극 장면을 경제적으로 연출할 것인가 고민했다. 이에 더해 조선 사람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스토리까지 정교하게 구축했다. 영화는 성공적이었다. 활극과 비극이 결합된 신파 형태를 취하면서도, 식민지적 상황을 상징과 비유가 담긴 이야기로 녹여 조선인의 민족적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이렇게 <아리랑>(1926)은 조선 무성영화의 대표작으로 한국영화사의 신전에 올랐다.
- [1. <아리랑> 전후 무성영화계] 중에서
조선영화계의 발성영화 제작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대극 장르이자 ‘교통선전영화’로 만들어졌다. 흥행계 실력자였던 와케지마 슈지로의 경성촬영소는 1930년대 중반 발성영화 국면을 주도하고 있었다. 김소봉(일본인 야마자키 유키히코), 이필우, 이명우 등 조선영화인과 일본영화인의 ‘협업시스템’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미몽> 역시 녹음은 이필우가 맡았고, <춘향전>에서 사용한 후 개선을 거듭한 ‘노이스레스 P. L. 시스템 조선폰’을 사용했다. 연출은 경성촬영소에서 도제로 성장한 양주남이 맡았다. 일본 쇼치쿠영화 출신의 김소봉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촬영소에서 그들의 도제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촬영 역시 경성촬영소에서 이필우의 도제시스템으로 수련한 황운조가 맡았다. 당국이 의뢰한 선전영화에서 조수급 양주남과 황운조가 데뷔의 기회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선만(鮮滿)교통타임즈사’ 주최,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는데, 1936년 11월 6일 우미관에서 개봉해 흥행에도 성공했다. 선만교통타임즈사의 순회 행사에서도 상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5. 발굴된 조선영화 분석 <미몽>(193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