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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41602154
· 쪽수 : 276쪽
· 출판일 : 2025-09-30
책 소개
그 힘을 신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_하성란(소설가)
“집을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여행해도 파트타임 여행자라 부른다.”
2024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 작가 반수연 신작 소설집
2020년대가 요청하는 이민자 서사의 뉴노멀
오늘날 한국 이민자 서사는 더이상 제3세계 변방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각광받는 주제로 변모했다. 영화 <미나리>(정이삭)와 <패스트 라이브즈>(셀린 송), 그리고『파친코』(이민진)와 『H마트에서 울다』(미셸 자우너)처럼 경계 위의 한인들의 이야기는 장르와 국경을 막론하고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더 생생하고 진실된 이민자 서사를 갈망하는 독자들의 요청에 부응할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서른 너머 나이에 캐나다로 떠나 27년을 살아온 저자 반수연은 네 차례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하며 굳건한 작품세계를 증명해왔다. 그리고 이민자 부녀의 마지막 ‘로드 트립’을 그려낸 「조각들」이 2024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독자들의 이목을 모은 바 있다. 그 외 동두천 기지촌 출신 이민자의 브루클린 생존 분투기, 인연들을 잃고 홀로 미국 국립공원 일주를 떠난 여성의 트레일 여행기, 이국의 양로원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 노년의 연인들 등 오늘도 이방인으로 전 세계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한인들의 하루하루가 담긴 『파트타임 여행자』는 경계 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어가는지 그 실감 가득한 일대기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애나는 애틀랜타와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떠돌았다. 이름도 바꾸고, 흔적도 지웠다. 그러는 사이 애나는 미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세 명의 남자를 더 만났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꿈이나 희망 따위를 믿는 것보다 더 지독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편하다는 걸 배웠다.
_「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에서
소설집을 여는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속 브루클린 거리는 짐짓 화창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동두천 기지촌 출신 이민자인 애나는 홈리스라서, 여성이라서 어디서든 핍박받으며 “정신이란 걸 내다버려서라도 고통을 줄이고 싶었던 거리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지난다. 그렇지만 각박한 삶 속에서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빠진 치아를 새로 해넣고 영어를 뜨문뜨문 연습하면서 “문득 열망을 품는” 그녀의 모습 너머로부터 달짝지근한 커피처럼 기대해볼 만한 미래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첫 소설이 이민자 사회 내부의 젠더·인종·계급 간 차이를 조명한다면 이어지는 「조각들」은 이민자 부녀의 세대 차이를 세밀히 묘사한다. 엄마를 잃은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직업도 나라도 버렸지만, 자라는 동안 조금씩 멀어져만 가던 딸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밴쿠버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떠난 마지막 로드 트립 동안 아버지와 딸은 서로 어떻게 세상에 적응해왔는지 알게 된다. 다른 모양의 나뭇조각이 서로 꼭 맞게끔 아귀를 맞추듯이, 차이를 존중으로 전환하는 시간을 함께함으로써.
영영 떠나온 한국, 여전히 이방인일 뿐인 이국
그 사이에서 떠도는 파트타임 존재들의 생생한 로드 트립
난 풀타임 여행자야. 집이 따로 없어. 여기가 집이란 뜻이지. 어딜 가든 이혼한 남편이 찾아와 괴롭히는 바람에 도망가기 좋은 집이 필요했다고 클로디아는 말했다. 집을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여행해도 파트타임 여행자라 부른다는 것을 민은 처음 알게 되었다. 파트타임 여행자라니 왠지 불완전한 여행자 같기도 했다.
_「파트타임 여행자」에서
표제작 「파트타임 여행자」는 집을 뒤로하고 위태로운 여행을 떠난 ‘파트타임 여행자’가 “아름답고 강한 혼자”로 피어나는 시간을 그려낸다. 가족은 물론, 가족처럼 여기던 인연들이 곁을 떠난 뒤 홀로 미국의 국립공원들로 여행을 떠난 화자는 떠남이 곧 자유가 아님을 깨닫는다. 지난 상실들을 곱씹는 동안 그는 어느새 삶이 곧 상실의 과정임을, 그 피할 수 없는 것을 직면할 때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는 진실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그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각기 미국 오리건주와 프랑스 파리, 캐나다 밴쿠버에서 다종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 곁을 따라 걷는다. 「춤을 춰도 될까요」는 노년의 연애를 터부시하는 억압 앞에서 “이해받지 않겠다고 이를 앙다”물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고, 지켜내야 할 존엄이라고” 다짐하며 인생 제2막을 열어젖히는 노년 여성의 이야기다. 남편이 죽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들을 두고 막막한 심정 속에 파리로 떠난 화자의 이야기인 「프레살레」는 갑작스러운 도난 사고와 일행 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을 극복할 때, “잃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들을 잃고도 살아진다”는 ‘생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는 비의를 전한다. 「빅터 아일랜드」에선 포르쉐 911만을 일생의 꿈으로 삼았던 남자가 등장한다. 뇌졸중 판정을 받고서도 아내와 아이를 위해 만두 공장에 나서는 그의 머릿속에선 애지중지했던 포르쉐의 가죽냄새 대신, 삶을 전부 내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랑스러운 아이와 아내의 모습이 유성처럼 쏟아진다.
소설집을 닫는 「화분의 시간」은 여행이 끝나고 들어선 집안의 반갑고도 낯선 실감을 느끼게 한다. 팬데믹 시기의 면회가 제한된 요양병원에 있는 엄마와, 지근거리에서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언니, 그리고 미국과 한국을 오갈 때마다 엄마와의 거리감을 실감하는 화자. 이 세 모녀는 지난 삶 내내 서로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애증의 역사로 얽혀 있다. 마지막을 예감하며 엄마의 아파트를 정리하는 시간은, 삶이라는 여행이 닫힐 때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도의 송가가 연주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각자가 통과하고 있는 삶-여행 도중에 사람들은 우연히 마주치고 같이 잠시나마 시간을 보내고, 때로 서로의 상실을 알아보며 함께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이 이방인들이 각자의 고독 안에 있으면서도 그 고독에 갇히지 않는 건 삶-여행이라는 형식이 이들에게 예상할 수 없는 우연한 마주침을 끊임없이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_김보경 해설, 「아름답고 강한 혼자들」에서
막막하게 광대한 미국 서부의 사막과도 같은 삶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파트타임 여행자』는 트레일 여행자를 돕는 ‘트레일 엔젤’처럼 짐을 줄이고 속도를 조절하는 법, 경계 위에서 자라나는 불안을 다루는 법, 돌아갈 힘까지 비축하는 법을 세심히 알려준다. 상실을 통과하며 살아내는 법을 체득할 때, 여행은 더이상 무언가를 얻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되리라. 그러므로 『파트타임 여행자』는 돌아옴을 예정한 여행이 아니라, 내 삶을 찾기 위해 진정한 여행을 떠나고픈 모든 이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길 위의 시간을 먼저 살아보는 인물들의 일곱 가지 다채로운 기록을, 다른 삶을 만나고 상상하기 위해 책을 펼치는 독자들에게 전한다.
집을 떠나온 후에야 뒤늦게 민은 왜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었는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현실을 견디고 싶어 꾀를 낸 건가 싶기도 했지만 뚜렷한 답은 얻어지지 않았다.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
_「파트타임 여행자」에서
목차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조각들
파트타임 여행자
춤을 춰도 될까요
프레살레
빅터 아일랜드
화분의 시간
해설 | 아름답고 강한 혼자들
김보경(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듯 머리 위로 지나가는 다리 이름을 하나씩 부른다. 브루클린아. 맨해튼아. 윌리엄스버그야. 그렇게 소리 내서 부르는 것만으로도 잠시 정다운 마음이 된다. 모두 맨해튼으로 연결된 다리다. 아래서 올려다보니 다리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길다. 다리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전체 구조가 강변에서는 잘 보인다. 이 일대는 한때 세상에서 제일 큰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그 설탕을 먹었다고도 했다. 이제 이곳은 노동자가 넘보기 힘든 고층 아파트, 호텔의 외관을 갖춘 오피스 빌딩, 설탕 공장에서 뜯어낸 의자와 소품을 활용한 놀이터, 그리고 바닥에 설치된 조명이 온화한 빛을 밝히는 강변 산책로가 들어섰다.
_「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그건 자유에 관한 거야. 내게 어마어마한 자유로움을 준다고.”
왜 몸을 학대하느냐고 물었을 때 지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는 말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너의 문신이 늘어날 때마다 내가 벌받는 기분이 든다는 말은 끝내 참지 못했다.
“자유가 아니라 너는, 사람들의 눈에 구속되는 거야. 네가 얼마나 공격적으로 보일지 생각해봤어?”
“상관없어. 어차피 사람들은 약자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걸 공격이라고 여기니까.”
“네가 이상한 애로 보일까봐 너무 걱정돼.”
“아빠가 그러니까 내가 남의 눈치나 보는 사람으로 자랐어. 그게 너무 싫다고.”
_「조각들」
민은 항아리를 거꾸로 쏟아냈다. 둘은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흥에 겨워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무려 삼백십 장이었다. 떠나고 싶을 때마다 오십 달러, 백 달러짜리 지폐를 하나씩 던져둔 게 그리 많을 줄은 민조차 몰랐다. 그러니까 삼백십 번이나 집을 떠나고 싶었다는 거잖아, 제이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크는 무릎 통증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민을 위해 차의 내부를 숙식이 가능한 공간으로 개조했다. 두꺼운 합판으로 평평하게 프레임을 만들고, 그 위에 차의 굴곡까지 본떠 12센티미터 메모리폼을 깔아 침대를 완성했다. 민은 자신이 떠나면 혼자 사막의 도시에 남겨질 제이크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이제야말로 열망에 화답해야 할 시간이라며 민을 떠밀었다.
_「파트타임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