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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8608446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0-05-10
목차
작가의 말
만필의 길이란 어떤 길일까
걸어서
발바닥
산사로 오르는 길
상엿소리
올가미
언제나 “충성!”
심 봤다!
교각
제삿날
두류산에서
외삼촌과 스파이
빨간 전화기
느티나무
슬픈 토끼
14시 반과 4시 반
할머니와 고모
교감
파계
한강
뱀
늑대 이야기
산중에서
황구렁이
벌 떼
환영
맞수
동자삼
공생
천렵
기연
꿈
허수아비의 친구
실신
겨울 여행길에서
어떤 눈물
빨간 넥타이
우정
살모사
천왕봉과 용산역
태풍 사라와 뱀
암자에서
저자소개
책속에서
산사로 오르는 길
헉헉거리며 토하는 숨소리는 한동안 집에서 잠잤던 심장을 두들기고 등줄기에 맺힌 땀은 기어이 두꺼운 등산복을 벗게 만든다. 햇살은 기슭에 양지를 만들어 누구나 쉬어가게 하는데 감사를 모르는 나는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는다. 버릇없는 행동에
짜증 내지 않는 엄마 같은 대자연은 잘 익은 햇살을 데리고 조용히 관조만 할 따름이다.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친구와 함께 운길산 수종사로 산행을 약속했다. 전철에서 오랜만에 마음 편한 잡담을 나눈다. 재미난 인생살이를 엿듣던 바보 같은 시간은 얼떨결에 철길을 건너뛰다가 거리를 잘못 계산해서 우리를 훨씬 더 빨리 역으로 데려오자 코스모스는 연신 허리를 잡고 웃는다.
수종사는 작년 가을에 한 번 다녀왔던 곳이다. 자연은 원을 그리고 우리는 원을 따라간다.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돌아 또다시 여기에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을 원을 따라 둥글게 돌리지만 막바지에는 세월을 숨기고 영원한 순환이 아닌 부활 없는 원점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소리에 기분이 좀 상한다.
심 봤다!
새벽 산을 오르는 산객은 아무도 깨지 않은 이른 시간에 어둑한 숲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험준한 기슭을 오르는 산짐승이 된다. 무엇을 찾으려고 새벽같이 산을 오를까. 힘이 들면 오르다 말고 중간쯤에서 기슭을 똑바로 뚫으면 맞은편 기슭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보이겠지만 뚫을 수 있는 눈이 없기에 오르고 올라야만 한다.
끝을 모르는 깊은 골짜기만큼이나 높이 치솟은 봉우리 어디쯤엔가 새벽이슬을 머금은 백년 묵은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는다는 전설의 봉황이 살고 있다는 영산을 찾기 위함이다.
산객은 어두운 숲을 헤매다가 희미하게 안개 모이는 계곡에서 간밤에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초록별 하나가 밤새도록 놀다가 길을 잃어 바위 옆에 작은 꽃으로 변한 야생화더러 신선이 살고 있는 고개티 너머 구름대문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는지 말해준다면 하늘로 보내주겠다고 장담한다.
매일매일 정직하게 살지 않는 산객은 영산에 오르기 위해 적어도 오늘 하루쯤은 착한 척하고 속였다.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거짓말쟁이임을 눈치챈 야생화는 새벽이슬을 모은 물방울로 세수를 하다 말고 얄미운 산객 바짓가랑이에 와락 쏟아붓고 엉뚱한 곳으로 길을 가르쳐주고선 깔깔거리며 웃는다.
빨간 전화기
창밖에 봄비가 내린다. 비는 새벽까지 내리고 만물은 태동의 준비를 갖춘다. 자연은 모든 만물에게 번성과 소실이란 법칙을 만들어 계절에게 주기적으로 회전하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인간은 의지의 소산이 아닌 계절에서 익힌 굴곡의 삶이라도 덧없음이 아닌 살아봄직한 일이라 자부하며 자연에 동화된 수단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봄을 맞이하여 오랫동안 보관해온 해묵은 물건들이 들어있는 케케묵은 궤짝을 열었다. 한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버릴 것과 또 다른 보관의 차이를 두면서 정리를 한다. 그중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빨간 전화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잊지 않으려고 테이프로 붙인 전화번호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아련한 생각에 잠긴다.
지나간 인생은 덧없음보다 아픈 회상 때문에 과거를 더욱 소중히 사랑하여 잊었던 이들을 품는 추상적 상념으로 인간감정을 불러 출렁이게 하는 것 이다. 그래서 영국시인 브라우닝은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이며 이 의미를 찾는 것이 나의 양식이고 음료수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