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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58790400
· 쪽수 : 456쪽
· 출판일 : 2016-07-08
책 소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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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미란다, 아서가 어젯밤에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이 흐릿해지더니 빛의 동그라미가 서로 겹쳐지며 한 줄로 늘어섰다. “정말 유감입니다. 이 소식을 뉴스를 통해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전화했어요.”
“얼마 전에 만났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2주 전에 토론토에서요.”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그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충격이죠. 정말……. 우린 열여덟 살 때부터 친구였어요. 나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요.”
“어쩌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요?” 그녀가 말했다.
“실은, 음…… 불쾌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실은 이런 게 아서가 원하던 죽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무대에서 죽었거든요. 〈리어 왕〉 4막 중간에 급성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연기하다가 쓰러졌다고요?”
“네. 관객 중에 의사가 두 명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급히 무대로 뛰어 올라가서 아서를 구하려고 애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하네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이 선언되었답니다.”
이렇게 끝이 날 수도 있구나. 통화가 끝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시시한 결말이라니. 그러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한때 함께 늙어갈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머나먼 타국에서 전화 한 통으로 알게 될 수도 있는 거였다.
근처의 어둠 속에서는 스페인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배들은 여전히 수평선 위에서 빛을 발했고 여전히 바람 한 점 없었다. 뉴욕은 아침이겠지. 그녀는 클라크가 맨해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상상했다. 전화기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마지막 달에 일어난 일이었다.
-본문 5장 중
사라진 것들의 목록:
바닥에서 초록색 불빛이 올라오는 수영장의 염소 처리된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일. 야간 조명등 아래에서 하는 야구 경기. 여름밤 나방이 몰려들던 현관 등. 엄청난 전력으로 도시 아래를 달리던 지하철. 도시. 영화. 다만 아주 드물게, 발전기를 돌리느라 대사가 절반 이상 안 들리는 영화를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연료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까지였다. 자동차 연료는 2, 3년 지나면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고, 비행기 연료는 좀 더 오래 가지만 구하기가 어려웠다.
콘서트 무대를 찍기 위해 사람들 머리 위로 휴대전화를 들어 올릴 때 어스름 속에 빛을 내뿜던 액정화면. 다채로운 할로겐 조명이 밝혀주던 화려한 무대, 전자음악, 펑크록, 전기 기타.
의약품. 손을 살짝 긁히거나 저녁을 차리려고 야채를 썰다가 손가락을 살짝 베이거나 개한테 물렸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
비행. 하늘에서 여객기 창문을 통해 반짝이는 불빛이 수놓인 도시들을 내려다보는 일. 10킬로미터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시각 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 비행기. 좌석 테이블을 접어서 잠가달라는 요청. 아니, 사실 비행기는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활주로와 격납고에, 잠든 채로. 날개에 눈이 쌓여갔다. 비행기는 겨울에는 식품저장고로 안성맞춤이었다. 여름이면 과수원 근처에 있는 비행기는 더위에 말라버린 과일을 담은 쟁반들로 가득 찼다. 십대들이 그 안에 숨어들어가 섹스를 했다. 녹이 꽃처럼 활짝 피고 줄줄 흘러내렸다.
국가. 국경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방서와 경찰. 도로 보수작업과 쓰레기 수거작업. 케네디 우주센터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와 반덴버그 공군기지, 플레세츠크 우주기지,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어 솟아오르던 우주선. 그 우주선이 대기층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던 불꽃.
인터넷. 소셜 미디어. 화면을 스크롤하며 지루하고 장황한 꿈 이야기와 불안한 희망과 음식 사진과 자살 예고와 자기 자랑과 하트 아이콘으로 된 연애 상태 업데이트와 곧 보자는 말과 각종 청원과 불평과 욕망과 할로윈에 곰이나 피망 옷을 입힌 아기들 사진을 보는 일. 다른 사람의 삶을 읽고 댓글을 다는 일. 그럼으로써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던 일. 아바타.
-본문 6장 중
문명의 종말은 거의 모든 것과 거의 모든 사람을 앗아갔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아직 남아 있다. 바뀐 세상의 황혼녘 풍경, 물가의 세인트데보라라는 수수께기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상연되고 있는 〈한여름 밤의 꿈〉, 8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는 미시간 호. 요정 여왕 티타니아로 분한 커스틴은 짧게 친 머리에 꽃으로 만든 왕관을 썼고, 광대뼈에 난 들쭉날쭉한 모양의 흉터는 촛불 때문에 흐릿하게 보인다. 관객들은 말이 없고, 사이드는 커스틴이 이스트 조던이라는 마을 근처 어느 죽은 남자의 집 벽장에서 찾아낸 턱시도를 입고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멈춰라, 이 뻔뻔하고 난잡한 여자야. 내가 남편이거늘.”
“그렇다면 난 부인이거늘.” 셰익스피어가 1594년, 두 계절에 걸친 전염병이 지나가고 런던 극장들이 다시 문을 열었던 해에 쓴 희곡의 대사다. 어쩌면 그 다음해인 1595년에, 셰익스피어의 외동아들이 죽기 1년 전에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몇 세기 뒤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서 커스틴은 분노와 사랑에 갈팡질팡하며 구름을 그린 천이 배경으로 걸려 있는 무대 위를 돌아다닌다. 뉴페토스키 근처의 어느 집을 뒤져서 찾아낸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시폰과 실크로 된 드레스에는 어린아이가 파란색 수채화 물감을 떨어뜨린 자국이 있다.
“당신은 어디서건 우리가 모여 바람에 맞춰 춤을 추려고 하면 방해를 했죠.” 그녀가 대사를 잇는다. 그녀는 이렇게 무대 위에 있을 때 가장 생기가 넘친다. 무대에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헛된 반주에 성난 바람은 독기 가득한 바다 안개를 대지 위에 뿜어대고…….”
대본에는 ‘독기 가득한’ 옆에 ‘역병 같은’이라고 메모가 적혀 있다. 유랑 악단이 갖고 있는 세 가지 판본의 대본 중에 커스틴이 제일 좋아하는 판본이다. 셰익스피어는 셋째로 태어났지만 유아기가 지나자 첫째가 되어 있었다. 그의 형제자매 네 명이 어렸을 때 죽었다. 그의 아들 햄넷은 열한 살 때 죽었고 쌍둥이 딸만 남았다. 전염병에 극장들은 문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했고 전역에서 죽음이 두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전기의 시대가 왔다 가고 다시 한 번 촛불로 불을 밝힌 황혼녘에, 티타니아가 돌아서서 요정의 왕을 마주본다. “홍수 관리자, 노기 띤 달의 파리한 얼굴, 습해진 공기, 도처에 깔린 신경통 환자.”
오베론은 수행원들인 요정들과 함께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티타니아는 오베론을 잊고 독백하듯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말없는 관객들과, 무대 왼쪽에서 조용히 큐 사인을 기다리고 있는 현악 파트 덕분에 높고 선명하게 들린다. “이 같은 날씨 이변에 계절도 뒤죽박죽이 되었죠.”
악단이 가진 세 대의 마차 모두 양면에 흰색 페인트로 ‘유랑 악단’이라고 적혀 있는데, 선두 마차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본문 11장 중
“그러니까 제 말은요, 선생님이 댄을 지도하면 분명히 많이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구체적인 여러 분야에서 개선되겠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쁨을 모르는 개자식일 거예요.”
“기쁨을 모르는…….”
“아뇨, 잠깐만요. 그건 쓰지 마세요. 다르게 표현할게요. 네,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를 지도하면 분명히 조금 바뀔 거예요. 그래도 성공했지만 불행한 사람인 건 바뀌지 않아요.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매일 밤 9시까지 일하는 불행한 사람 말이에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마세요. 불행한 결혼생활은 티가 나기 마련이거든요. 그건 구취가 있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알 수 있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전 지금 인생을 좀 달리 살았으면 어땠을까, 뭐라도 좀 다른 것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제 말이 너무 심한가요?”
“아뇨, 계속하세요.”
“좋아요. 전 제 일을 사랑해요. 제 상관이 제 인터뷰 내용을 알아볼까 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익명으로 해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릴 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어찌 됐든 가끔 주위를 둘러보면, 기업에는 유령들이 가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로요. 아니, 수정할게요. 학계도 다르지 않아요. 부모님이 학계에 계셔서 그 호러쇼를 앞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봤거든요.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는 유령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네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전 지금 자기가 선택한 삶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들은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았어요.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한들 불가능하죠. 은행 대출도 있고, 자식도 있고, 등등. 덫에 걸린 거죠. 댄이 바로 그런 경우예요.”
“당신은 댄이 자기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군요.”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자기가 그렇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어요. 본질적으로 고기능 몽유병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의 어느 부분이 클라크로 하여금 울고 싶게 만들었을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을 최대한 곧이곧대로 받아 적었다.
-본문 26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