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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8965341
· 쪽수 : 236쪽
· 출판일 : 2021-10-29
책 소개
목차
제1부 문은 두드릴 때 열린다
문을 열다•13/건망증•18/작목반•21/착한 거짓말이 물어다 준 행복•24/교차로•28/느림의 미학•33/위험한 거처•37/딸과 구두•40/휴가 그리고,•45/일리포 가는 길•49/29의 절반•53/길의 반란•61/가을이 깊다•64
제2부 자신을 섬길 줄 알아야 한다
공짜의 유혹•71/빈집•75/짜장면에 대한 단상•82/사과•86/독초 이야기•90/부메랑•94/텃밭 이야기•98/맹꽁이•102/들불•105/갈증•108/택배•112/나를 섬기고 살자•116
제3부 나무는 가지 끝에서 계절을 연다
자연에 대한 예의•123/봄을 심다•126/빈 들•130/유월의 노래•135/삶의 골조를 세우는 일•138/나무는 가지 끝에서 계절을 연다•144/망초꽃 핀 들녘•147/매실 익는 아침•151/365일 더하기 3박 4일•156/007 가방의 비밀•161/그날•166
제4부 진심을 다하면 통한다
미안해, 엄마•175/자존감•178/슈퍼우먼의 비애•182/은행나무•186/오월 동화•196/연탄•202/가족•206/동기간•210/아기장수의 비밀•215/우울한 여행•219/봄 마중•222/꾹꾹이•226/이정표•232
책속에서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느냐만 늘 공짜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서 사은품이 욕심나서 구매하고 상품권을 미끼로 한 상술에 걸려든다.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나 같은 소비자를 향한 마케팅에 성공한 셈이다. 공짜 혹은 덤은 사람을 즐겁게 만든다. 결국엔 제값을 다 치르고 사는 상품일지라도 흥정과 실랑이를 하고 작은 것이라도 덤으로 받으면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재래시장에 가면 에누리와 덕담이 있고 삶의 생기가 넘쳐나서 좋다. 물건에서 얻는 공짜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배려가 공짜의 행복이다. 덕담을 덤으로 얹어주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언어의 과소비는 얼마든지 좋다. 공짜의 웃음과 공짜의 행복을 오늘의 사은품으로 당신께 보낸다.
― 본문 「공짜의 유혹」 중에서
딸애가 현관을 나선 후 신발장을 열어본다. 신발장 안에는 크고 작은 사연이 신발 코를 세우고 있다. 새 신발을 신고 명동을 누비다 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절룩이며 들어와서는 이내 벗어던진 하이힐이며 굽이 10센티는 족히 될 것 같은 부츠 그리고 납작한 샌들이며 각양각색의 구두와 운동화가 세상 구경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저 신발들이 주인을 업고 학교며 카페며 각종 동아리 모임 등 곳곳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다. 가끔은 굽을 주저앉혀 주인의 눈물을 빼기도 했고 주인보다 먼저 옆으로 누워 굽을 갈아달라고 하소연도 했을 것이다.
미니스커트의 주인을 위해 얌전한 듯 뒤뚱거리는 걸음을 걷기도 했을 것이며 청바지 차림의 활달한 연출을 위해 빨간 운동화가 한몫했을 것이다. 여러 신발 중에 검은 구두 한 켤레가 나를 붙잡는다.
예고 입학식을 앞두고 구두를 사기 위해 수원과 평택의 구두점은 거의 다 돌아다녔다. 백화점이며 시장 아울렛 등 며칠에 거쳐서 아이를 따라다녔다. 그 많은 구두 중에 맘에 드는 구두가 없다고 했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맘에 안 들고……. 나중에는 둘 다 지쳐서 돌아다닐 힘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구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고가의 구두였다. 학생이 신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구두였지만 더는 싸울 힘도 말릴 명분도 없어 그냥 사게 했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산 구두를 몇 번 신더니 학교에서 눈치도 보이고 부담스러워서 못 신겠다며 시장에서 저가의 구두를 새로 장만했다.
― 본문 「딸과 구두」 중에서
노파는 오래도록 치매를 앓아 왔다. 칠 벗겨진 초록빛 대문 앞 화석처럼 웅크려 있던 노파. 아침이면 늘 대문 앞에 나와 언제 적 기우다 만 사연인지 아교 같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느질할 뿐, 그 노인 말이 없다. 실을 꿰어 동그랗게 매듭을 짓고 앞섶을 말아 올려 박음질을 하고 반쯤 풀어헤친 옷고름에 인두질을 하다간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노인은 문 밖을 지키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땅바닥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겼다간 지우고 또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는 이내 어깨를 들썩이곤 했다. 나무가 그늘을 거둬들일 때까지 그 노인은 같은 자리에서 세월을 감치곤 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가슴에 새기려 했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꾸만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자식들의 모습을, 그 이름을 심으려 했음일 게다. 풀린 옷고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쪼그라든 젖무덤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그녀의 삶을 대신해주듯 팍팍함이 묻어났다.
노인은 사십 중반에 주정뱅이 남편을 여의고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일찍 혼자된 시어른은 계집 잘못 들여서 아들이 단명했다면서 자식 앞세운 설움을 며느리에게 쏟아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문을 나서고 싶었고, 마음으론 수없이 보따리를 쌌지만 차마 자식들 앞에서 그럴 수 없어 참고 산 세월이었다. 말이 사는 것이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모진 시집살이와 가난을 보다 못한 이웃이 두부장사 홀아비를 소개시켜주면서 야반도주를 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니 그 노파의 삶이 가히 짐작이 된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고 돈이 되는 일이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다. 여인이 아니고 어머니이기에 참아낸 세월이 아니었을까 싶다.
― 본문 「빈집」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