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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8966782
· 쪽수 : 144쪽
· 출판일 : 2025-01-10
책 소개
목차
제1부
사북•13/뒤섞인 시간•14/사후세계관•16/맞거울의 호수•20/일회용 우산•22/시부야•24/Amy•26/탕후루•28/F5•30/펑•32/가라 인생•34/이경규의 몰래카메라•36
제2부
퉤퉤퉤•41/시작점•42/열두 살, 열두 시•44/이불 킥•46/바버샵•48/고양이의 마음•51/Non‐diatonic•52/이윽고 또다시 명절•54/잠정 은퇴•56/이진법•58/명견 강삼돌•59/52,000km•62
제3부
반성문•65/스캣•68/퇴위•70/욕•72/역류성 식도염•75/버러지•78/실망의 달인•80/오부리•82/워크에식(Work ethic)•84/폭설과 블루스•86/탱크주의•88/무임금 노가다•90/미지와의 조우•92
제4부
Bass•97/카레라이스•98/빌드업•100/충분한 시간•102/110cc•104/나이롱 신자•106/필모그래피•108/비몽사몽•111/오토튠•114/오마카세•116/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118/영원한 노래•120/이 한 편은 당신을 위해•124/그대•126
해설 조대한(문학평론가)•127
저자소개
책속에서
[해설 엿보기]
강백수 시인의 시집 속에서 ‘나’를 이루는 근저에는 ‘시와 노래’가 놓여 있다. 이는 본인 스스로를 ‘문학과 음악의 요정’이라 칭하는 강백수 시인 본연의 페르소나와 일정 부분 겹쳐지는 시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예술이라는 범박한 이름으로 지칭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은 대부분 술에 취한 이미지와 함께 그려진다. 그것은 “이천 씨씨 맥주 피쳐에 소주를 들이붓고 그걸 한 방에 마시겠다고 객기를 부리고” “거리를 낄낄거리며 달리고 울고 벽을 치다 주먹이 깨지고 그렇게 매일을 보내던 뜨거운 시절”(「퇴위」)이거나, “안온한 C키의 세계”가 아닌 “술을 마시러 나가고/욕을 하고/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내게 유해한 글”로 만든 “구겨 넣은 #들의 행패”(「Non-diatonic」)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앞서 한 사람의 구원이 다른 이의 평범한 일상을 훼손시키며 시작되었던 것처럼, 시인의 세계 역시 누군가의 안온한 일상을 뒤틀고 망치는 와중에 만들어진다. 하지만 시인은 그에 대한 적법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거나 자신의 세계를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시인은 그 ‘불안’과 ‘위태로움’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잘못은 주로 아내와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하는데 뜻밖에도 나는 존경하는 검사님께 반성문을 쓰고 있다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앞이 잘 안 보였고
길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고 부모님도 친구들도 필요할 때만 찾는 주제에 전방주시태만과 신호위반이 죽을죄인 양 눈물겹게 빈다
저는 소득이 불규칙한 예술인입니다
가뜩이나 없이 사는데
지난 몇 년간 코로나 19로 소득은 급감하여
더없이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로 인한 피해자는 상대 차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선물 하나 못 받아본 아내와 매일 걱정해야 했던 부모님과 술값을 계산해야 했던 친구들인데 존경하는 검사님께 하소연을 해댄다
― 「반성문」 부분
막 사는 것 같았지
하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었던 것 같아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것 같았지만
그 어지러운 풍경 속에서
환상과 현실을 양쪽 눈으로 동시에 볼 줄 알았어
그걸 글로 적으면 문학이 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흥성거리는 풍경의 일부이고자 했지
― 「스캣」 부분
이 같은 시인의 미학을 조금 더 자세히 논의하기 위해 3부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두 편의 시를 나란히 읽어보자. 「반성문」의 시적 화자는 교통 법규와 관련된 모종의 잘못을 저지른 듯하다. ‘나’가 반성문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경감시키기 위해서이다. 평소 그럴듯한 선물 하나 건네지 못했던 아내, 밤새 나를 걱정하는 부모, 늘 술값을 대신 계산해 주는 친구들에도 빌어본 적 없는 나는 얼굴도 모르는 검사에게 온 힘을 다해 스스로의 처연함과 성실함을 주장한다. “소득이 불규칙한 예술인”에게 너그러운 선처를 내려주신다면 오롯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이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을 길러내고 스스로도 “국가 발전에” 애써 “이바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나의 본심은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자신이 반성문의 맞춤법이나 고민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 몇백만 원의 벌금이 아쉬워 납작 엎드린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자조에 가까운 것 같다. 이렇듯 해당 시편은 내가 쌓아 올린 사회적 언어와 그에 어긋나는 내면의 언어의 교차 발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언어의 불협화음은 시인이 만들어내는 미적 세계의 핵심축을 이루는 구조적 요소이기도 하다.
아래의 작품 「스캣」은 그러한 두 세계의 겹침, “환상과 현실” “양쪽”을 넘나들며 생성되는 시적 언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작품 속에는 ‘나’가 기억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다른 작품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에 대한 기억 또한 취기와 노래와 담배 연기가 뒤섞인 “어지러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지만 술값은 단 한 번도 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특별히 재미도 없는 이야기들을 불콰한 목소리로 건네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그 생사 여부도 미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몇 년이고 연락이 끊겼다가 한 번씩 불쑥 모습을 드러낼 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천진한 표정으로 대답을 얼버무린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그를 떠올리고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그의 중얼거림을 그리워한다. 묘한 깊이로 나를 울렸던 그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불분명한 나의 기억과 그때의 “흥성거리는 풍경의 일부”로서만 세계 내에 존재한다. 그것은 즉흥적인 스캣의 흥얼거림처럼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악보와 지면의 안온한 세계에서는 감각하지 못하는 현장의 소음과도 같은 것, 다시 재현해 보려고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단독적인 사건이자 이미 우리를 지나쳐간 그 무엇에 가깝다.
― 조대한(문학평론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는
딴 자와 잃은 자가 있다
딴 자는 산 자보다는 조금 죽어 있고
잃은 자는 죽은 자보다는 조금 살아 있다
딴 자에게 전당포들은 왜 존재하는가
잃은 자에게 룸싸롱들은 어떤 의미일까
따 놓고도 흐르는 욕설과
잃어 놓고도 샘솟는 희망이여
그 위로 속절없이
은총처럼 눈이 내린다
― 「사북」 전문
꽉 막힌 올림픽대로
하품을 하던 택시기사가 묻는다
손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노량진에서 회 뜹니다
낯선 사람이 나에 대해 물으면
가짜 신분을 내어놓는 일은
내가 즐겨하는 놀이랄까 악취미랄까
요즘은 무슨 생선이 좋습니까
저는 사시사철 광어가 제일 맛있습니다
돈은 많이 버십니까
사람들 사는 게 다 비슷하죠
택시에서 내릴 무렵에는
애도 둘이나 있고 이혼도 경험한
충청도 사내가 되어 있다
택시에서 나이트클럽에서
미용실에서 나는
판교에서 일하는 개발자도 되었다가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생도 되었다가
수완 없는 중고차 딜러도 되었다가
결혼도 두어번 했다가 총각 행세도 했다가
독신주의자도 되었다가
그냥 아무 말이나 하다가 결국 줄행랑을 친다
끝내 신분을 들키지 않았다고 안도하지만
들킬 신분이 내게 있기나 했던가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두려운 일
그렇다고 매번 같은 사람 행세를 하는 것도
누군가를 사칭하는 듯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 되고 말 테니
나는 또 새로운 신분을 창작한다
그렇게 쌓인 수많은 나 사이에서
진짜 나는 희미해지고 희미해지고
끝내 사라지길 바라며
― 「가라 인생」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