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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현대화

대만의 현대화

(역사문화적 회고와 전망)

황쥔지에 (지은이), 강준영, 장영희, 안성수 (옮긴이), 이동형 (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2016-05-25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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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현대화

책 정보

· 제목 : 대만의 현대화 (역사문화적 회고와 전망)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각국정치사정/정치사 > 아시아
· ISBN : 9791159010835
· 쪽수 : 320쪽

책 소개

대만은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현대화 과정을 거친 후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고 있으며, 21세기 새로운 문화를 건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 대만의 역사적 변화를 관찰하며 쓴 결과물로, 역사적 회고의 기초 위에서 저자 개인의 전망을 제시한 8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목차

한글판 서문 … 7

저자 서문 … 13

제1장 전후(戰後) 대만의 사회문화적 전환: 현상과 해석 … 23

제2장 토지개혁이 대만 농촌과 농민에게 가져온 충격 … 83

제3장 전후 초기 토지개혁 전후의 자경농과 당면한 문제들 … 105

제4장 전후 초기 토지개혁 과정 중의 몇 가지 문제점
― 울프 라진스키의 서신 분석을 통해 … 135

제5장 전후 대만 농촌 사회문화 발전의 해석
― 양마오춘의 관점과 한계 … 171

제6장 유교적 전통과 21세기 대만의 전망 … 215

제7장 역사의식과 21세기 양안관계의 전망 … 243

제8장 21세기 대만의 신문화: 함의, 문제, 비전 … 287

저자소개

황쥔지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국립대만대 석좌교수 및 인문사회고등연구원 원장. 대만 중앙연수원 문사철연구소 초빙연구원. 국립대만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유학, 중국 사상사, 전후 대만의 역사 및 대만의 대학 교육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 왔다. 『孟學思想史論』, 『東亞儒學史的新視野』, 『德川日本論語詮釋史論』, 『東亞儒學: 經典與詮釋的辯證』, 『東亞儒學視域中的徐復觀及其思想』, 『東亞文化交流中的儒家經典與理念: 互動、 轉化與融合』, 『轉變中的大學通識育: 理念、 現況與展望』, 『全球化時代大學通識育的新挑戰』, 『大學通識育的理念與實踐』 등이 있고 이 중 다수의 저서가 미국과 일본에 번역,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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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대만 국립정치대학 동아연구소에서 중국정치경제학을 전공해 석⋅박사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이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을 역임하였고 해군발전자문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중국 및 국제관계 시사평론가로 활동중이며, 『한권으로 이해하는 중국』, 『중국의 정체성』, 『판도라의 상자 중국』등 20여권의 저역서와 약 110편의 학술논문이 있다. E-mail: jykang@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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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옮긴이)    정보 더보기
국립대만대 국가발전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대, 충남대,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성균중국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중국 정치외교, 대만정치 및 양안관계,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장영희 박사는 중국의 관점을 서술한 5장을 책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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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수 (옮긴이)    정보 더보기
목포대학교 중문학과 학사와 대만해양대학교 해양문화연구소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대만대학교 국가발전연구소 박사과정에서 근세 동아시아 사상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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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형 (옮긴이)    정보 더보기
경북 안동 출생 고려대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학박사 역저서에 『법구비유경』, 『금강경 육조대사구결』, 『화엄경요해』, 『반야심경 강의』, 『선림보훈 주해』, 『불교의 효』, 『지장경 효사상』, 『대장부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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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글판 저자 서문

《대만의 현대화: 역사문화적 회고와 전망》(원제: 戰後臺灣的轉型及其展望)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준영 교수의 호의에 힘입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강준영 교수와 한국외대 출판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한국어판 출간을 기회로 전후 대만의 전환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1949년 이후 대중화(大中華) 문화권에 속한 대만에게 가장 다행스러운 것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장장 10년 동안 지속된 중국 대륙에서의 동란(역자주: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일컬음)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통 중화문화의 가치, 특히 생활방식으로서의 유가(儒家)적 가치가 대만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이 보존될 수 있었다. 전통 한인(漢人) 사회에서 중시되었던 타인에 대한 충실하고 온후한 태도, 화목을 추구하는 처세, 낙천적이고 달관적인 미덕을 대만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록 대만의 급속한 민주화와 권력 구조의 격변 과정에서 각종 불행한 정치 투쟁이 발생했지만, 한문화(漢文化) 전통은 필경 대만사회와 문화의 뼈대를 이룬다. 따라서 짧은 시간 내에 요동하지 않을 것이며 뿌리가 뽑히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물결이 요동친다고 바닷물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으며, 단기적인 기온의 상승과 저하가 기후의 대세를 바꾸기는 어렵다. 한인들이 대만에 이민해 온 이후로, 전통 유가(儒家)적 가치이념은 수 백 년 동안 일상생활 속의 공기와 같이 대만 사회에 스며들어 있다. 평상시에는 감지하기 어렵지만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다 그 생명력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청대 건륭 연간(1735-1795)에 대만의 린수앙원(林爽文, 1756-1788)이란 사람에 의해 벌어진 반청 운동(역사에서는 ‘린수앙원의 난’이라 칭함)은 신주(新竹) 지역의 객가(客家) 사람들에 의해 조직된 민단(民團, 치안유지를 위한 민간 무장단체)의 저항을 받았다. 객가 민단은 청조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장저우(?州) 출신의 린수앙원과 전투를 벌였다. 처참한 전투와 함께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는데, 청 조정은 린수앙원 무리를 평정한 후 객가 출신의 사망자들을 안장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의민묘(義民廟)를 세워 주었다. 이 사건은 비록 민남인과 객가인 사이의 충돌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뒤에 두고 있지만, 객가인 특유의 고향과 땅을 지키려는 족군(族群)적 지방의식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객가인들의 충의를 중시하는 가치이념은 바로 유가적 전통의 중요한 가치관인 것이다.
1895년 일본 식민자들이 대만을 점령한 이후 현대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대만의 계급분화가 더욱 뚜렷해졌다. 자본가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일본 자본에 부역하는 극소수의 대만 자본가들로 이뤄졌다. 대다수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민남인과 객가인으로 이뤄진 대만인들이었다. 그래서 민족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이 일제시대(1895-1945)의 대만에서 변증법적 합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의 저서 <제국주의 하의 대만>을 참고할 것.) [역자주: 이 책의 원서명은 ‘帝?主義下の台?’이며, 대만에서 출판된 중문 번역본으로는 《日本帝國主義下之臺灣》(周憲文譯, 臺北: 海峽{學術出版社, 2002年)이 있음] 당시 수많은 대만 출신의 지식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지지대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유가 사상이었다. 대만문화협회(臺灣文化協會) 인사들은 타이베이에서 <논어>와 공자사상을 연설함으로써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유학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역할을 했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 광복 이후, 유가 전통 속의 근검과 성실의 노동윤리는 전후 대만의 경제발전에 정신적 기초가 되기도 했다.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고 빠르게 민주화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대만은 2000년과 2008년, 두 차례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는데, 이는 화인(華人)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정치가 꽃을 피운 것으로 참으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적 조류와 함께 들어온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적 행태에 따라 대만 민주정치의 불건전한 면모도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대만은 중서(中西)의 신구 문화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섬으로서, 확실히 서구의 현대적 정치생활 방식의 영향력이 전통문화를 능가하게 되었다.
현대 대만에서의 정치영역은 기본적으로 이익의 충돌과 교환의 장(場)일 뿐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특히 초당파적 협력의 정신(bipartisanship)이 결핍되어 인민들의 복지를 돌보지 않고 정당 간의 악투만 벌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만 민간사회에는 유가 정신을 계승한 가치이념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다. 대만의 여러 큰 불교종단들이 유가적 가치이념을 추동하는 데 여력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전통 중화문화가 일반사회에 널리 보급되도록 하고 있다.
최근 10여 년간 대만에서 벌어진 권력 충돌, 정체성 분열, 정당 간 분쟁의 겉모습 뒤에는 여전히 민간사회의 방대한 중도적 힘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대만의 사회문화적 진정제 같은 것이다. 필자는 새로 펴낸 영문 졸저(Chun-chieh Huang, Taiwan in Transformation: Retrospect and Prospect, New Branswick, N. J.: Transaction Publishers, 2014)에서 이에 대한 논의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21세기 양안(兩岸) 해협 간의 교류와 상호작용 속에서 대만이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치이념 및 생활윤리, 특히 유가적 가치이념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민족(漢民族) 문화의 미래에 새로운 국면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대만 의식’(臺灣意識)의 새로운 발전이 가장 관건이 될 것이다. 1895년 이후 ‘대만 의식’의 발전은 모두 명확한 특정 목표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대만 의식’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고, 일본의 강압에 반대했다. 광복 이후의 ‘대만의식’은 당시 국민당 정권의 본성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억압에 대한 것으로 권력분배의 불공평함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계엄이 종결된 이후의시기에 ‘신대만인(新臺灣人) 의식’은 내부적으로 각 족군들이 대만에 거주하는 사람들 간의 단결을 추구하고 대외적으로 중공 정권의 압력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체 역사 현상의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백 년간 각 단계마다 투사된 ‘대만 의식’이란 담론은 본질적으로 저항의 담론이었다. 목적은 대내적으로 민심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黃俊傑:《臺灣意識與臺灣文化》, 臺北:臺大出版中心, 2007年. 제1장을 참고할 것]역사상 저항 담론으로서의 ‘대만 의식’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국민당의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고 중공의 압박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21세기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미래의 ‘대만 의식’이 점점 유가적 가치 이념을 기초로 하는 문화담론으로 전환된다면 비교적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만 의식’으로 하여금 21세기 새로운 세계질서와 양안해협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전후 화인(華人)들의 역사에서 대만은 다행히도 ‘10년 동란’(역자주: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일컬음)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중화문화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 전통과 가치이념이 모두 대만에서 보존되고 확대, 발전할 수 있었다. ‘대만 의식’과 ‘대만의 경험’ 속에 들어간 새로운 유가문화 담론은 필연적으로 양안해협의 중국인들을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이끌어 갈 것이다.
대만과 한국의 관계가 밀접하고 우호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의 대만연구센터가 대만과 한국의 지식계를 잇는 교류에 힘을 쓰고 있고, 대만연구센터에서 출판 중인 대만연구 총서는 시간적으로 17세기에서 21세기의 대만을 포괄하고 있다. 전통문화를 회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전망하고 있고, 학문적 깊이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참고 가치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대만연구가 나날이 발전할 것이라 믿고 있으며 한국과 대만의 학술 교류에 큰 공헌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

대만대 인문사회고등연구원에서
2015년 10월 27일 저자 황쥔지에 씀


저자 서문

《대만의 현대화: 역사문화적 회고와 전망》(원제: 戰後臺灣的轉型及其展望)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1990년대 초에 쓴 글들이다. 여기에 수록된 8편의 논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기본적으로 전후 대만의 토지개혁과 문화발전이라는 두 가지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출판을 빌미로 하여 독자들에게 이 글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설명 드리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만은 역사적 격변을 경험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하고 국민정부가 대만에 오면서 정치권력은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다. 전후 대만의 경제발전과 사회문화적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전후 40여년동안 왕성하게 발전한 경제력으로 인해 축적된 사회적 역량은, 1987년 7월 계엄령 해제 이후 빠른 기세로 도약하여 정치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대만 민주화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격류는, 아름다운 파도가 진흙과 모래도 함께 끌고 오는 것처럼, 출신지역에 따른 대립(省籍對立, 역자주: 대만의 원 거주민들과 대륙 출신 이주민들 간의 대립)과 계급충돌, 그리고 족군(族群) 간의 긴장 등과 같은 추세가 대만사회의 병폐로 자리잡게 되었다.역사 속의 인민들은 늘 침묵하는 존재이며, 역사의 격변 속에서 마치 대저택의 처마 밑에서 지저귀는 제비와 같은 신세를 피하지 못하고 정권의 변화에 따라 귀속할 곳이 바뀌곤 한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시점을 맞이하여 필자 또한 역사의 대해(大海)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그 까닭을 살피게 되었다. 그래서 근 반세기 이래 대만의 격변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인지를 연구하게 되었다. 본서에 수록된 8편의 논문은 필자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관찰하며 쓴 결과물이
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회고의 기초 위에서 필자 개인의 전망을 제시해보았다. 이 8편의 논문은 모두 왠지 모를 절박감이 채찍질하는 감성 속에서 이성적 태도를 견지하며 쓴 글들이다.
전후 대만의 역사적 변화는 그 여파가 파도와 같이 웅대하고 그 범위가 매우 넓다. 피눈물과 환한 웃음이 그 속에 어려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적 변화의 주축은 아무래도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축에서 각 방면의 변화가 발생했다. 본서의 제1장은 수필적 성격을 갖는 글로서 전후 대만의 사회문화적 변화의 중요한 연구문헌들을 전면적으로 회고해 보았다.
이 글은 책 전체적으로 참고해야 할 배경으로 삼을 수 있겠다. 필자의 개인적 시각에서 전후 대만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광복 초기의 토지개혁이라고 하겠다. 본서 전반부의 3편의 논문은 모두 국민정부가 추진한 1950년대의 토지개혁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제2편의 논문에서 필자가 언급한 것처럼,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중국의 농업적 전통이 함유하고 있는 기술혁신과 시장경제라는 두 가지 특징이 전후 대만에서 비로서 그 현대적 발현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농업시험장(農業試驗場)이 경작의 정교성(精細耕作)이라는 전통에 현대적 기반을 다졌다면, 광복 이후의 농부회(農復會)는 기술혁신을 더욱 높은 단계로 도약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대만의 자본주의화는 대만 농업의 시장경제적 성격을 더욱 성숙시켰다. 1950년대 토지개혁의 완성은 정부의 힘이 아주 깊이 농촌에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대만 농촌의 경제질서를 재편함으로써 ‘국가’와 ‘사회’를 더욱 긴밀하게 결합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대만의 경제 기적 이후 대만농업은 도리어 황혼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농민들은 농업에서 멀어져 현대공업사회 속에서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다. 대만 농민들은 현대화를 경험한 이후, 이미 다시는 초가삼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들은 현대 공업 및 상업사회의 격류 속에 의지할 데 없이 떠도는 부평초 신세가 되었다. 대만의 농촌과 농민은 이러한 ‘역사의 패러독스’가 일으킨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참혹하게 스러져 가는 존재가 되었다. 전후 대만의 “경제 기적”속에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희생된 계층이다. 토지개혁이 맹렬한 기세로 전개되던 1950년대에 당시 농부회(農復會)주임위원인 장멍린(蔣夢麟, 1886-1964)은 농업건설이 반드시 농민의 입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당시의 중국농촌부흥위원회(中國農村復興委員會)가 “겸허한 마음으로 농민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장멍린(蔣夢麟)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역 및 농민의 입장에서 그들의 필요를 이해한다는 것이란, 그들이 어떠해야 하는지 혹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농부회의 임무는 늘 진화해야 하고, 농민으로부터 늘 새로운 경험을 얻어내야 한다. 우리들은 선입관을 갖고 일을 해나가서는 안 된다. 겸허한 마음으로 농민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 농부회의 방침이 부단히 진화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될 것이다.
장멍린이 1950년대 제시한 원칙은, 분명히 1920년대 이래 중국의 지식인들이 농업건설에 참여할 때 출현했던 근본문제와 관련이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원칙이 전후 대만에서 온전하게 실행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후 대만에서 농업건설의 설계와 집행(초기의 비료환곡 제도나 식량저가 정책 등이나, 1980년대 이래의 외국 농산품의 수입정책 등)은 온전히 장멍린이 얘기한 “지역과 농민의 입장에서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자”는 입장에 확고히 서있지 못했다. 즉, 전후 대만의 농업정책에서 농민은 주체적 지위를 갖지 못했다. 농업과 농민은 전후 초기에는 “군수민량(軍需民糧)”의 도구였고, 1960년대 이후에는 “공업도약”의 기반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주체성의 뒤바뀜(錯置)”은 바로 대만농업과 농민문제가 많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근본원인이다. 대만 성정부(省政府) 농림청장은 과거 성의회(省議會)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업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려면, 기술본위의 낡은 관념을 버리고, 농민본위의 이념으로 대체해야 한다.”(1988년 4월 30일 대만의 여러 신문에서 보도되었음.) 이렇게 농업을 주관하고 있는 관료 스스로의 반성은 ‘농민 주체성’의 건립을 증명하는 것이며, 바로 전후 대만 농업의 근본과제이다. 그러나 갈수록 다원화 되어가는 대만 사회의 “다원적 주체의 병립”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 속에서 “농민 주체성의 재건”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우리는 농민문제가 절대적으로 고립적이거나 기계적 존재가 아니며, 변증법적이고 유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농민과 사회적 역량 그리고 정치적 역량의 삼자간 상호적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농산품의 운송과 판매, 그리고 외국 농산품의 수입 문제를 어떻게 국내 및 국제정치경제 구조 속에서 정돈할 것인지, 농민과 중산층, 노동자 계층, 지식인 계층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 식량정책의사회적 의의와 정치적 의의는 어디에 있는지 등의 문제를 심사숙고 해야한다. 이러한 여러 문제는 광의의 농민을 어떻게 범주화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문제이며 대만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농민과 농업 문제의 복합성을 커버할 수 있을 때만 우리들은 진정으로 전후의 “대만 경험”의 정치경제적 함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본서의 제3장과 제4장의 논문을 쓰게 된 원래 동기는, 광복 초기 토지개혁 과정 중에 출현한 복잡다단한 정치경제학적 관계들을 깊이 있게 탐색하는 데 있었다. 광복 초기의 신흥 자경농들은 처음 토지를 획득하면 서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가난한 사람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다”는 말이 암시하는 부조리의 먹구름을 일거에 걷어 버렸다. 마치 큰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일부 신흥 자경농들은 농촌 고리대(高利貸)와 입도선매와 같은 착취를 겪었고, 유휴자금이 농촌에 유입되어 경지 매입에 사용되거나 지주들의 농지임대 철회 및 소작농에게 부여된 국유농지의 매입 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상업자본의 발달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나머지는 정부가 공지방령(公地放領, 역자주: 정부가 법령에 의거하여 적합한 농민들에게 공지를 불하하는 것)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행할 수 없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즉, 국가자본주의의 발달과 국영기업의 방대한 자산과 크게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 부문에서 채택한 자경농 보호정책은 자본의 방출을 통해 신흥 자경농이 자본가나 지주의 침입을 받지 않게 하는 것에 있었다. 소위 ‘국가자본주의’의 문제였다. 토지개혁 기간에 대만제당업(糖業) 기업의 토지는 농민들에게 불하(放領)하지 않은 여러 케이스들이 그 문제를 여지없이 보여줬다.
본서의 제4장은 1952년 9월, 중국농촌부흥연합위원회(農復會, 1948년 10월 1일에서 1979년 3월 16일)의 요청에 응하여, 대만을 방문한 미국 농업부 토지전문가인 울프 라진스키(Wolf Ladjinski)가 장개석 총통(1887-1975)에게 제출한 건의 서한을 중심으로, 광복 초기 대만이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나타난 세 가지 현상을 검토한 것이다.

(1) 국가 자본주의 하에서 국영기업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
(2) 토지개혁 정책과 경제정책의 모순
(3) 토지 개혁 중 농부회의 지위와 역할

중요한 사료인 울프 라진스키(Wolf Ladjinski)의 서신에 대한 심층분석을 통해, 우리들은 1950년대 토지개혁의 과정에 나타난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광복 초기 국민정부가 추진한 공지방령(公地放領)정책이 당시 농산품 수출로 외환 상의 이익을 보던 경제정책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울프 라진스키(Wolf Ladjinski)라는 미국의 전문가는 완전히 토지개혁 본위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보았고, 결국 무의식 중에 이 지뢰를 건드렸다. 필자는 이 세편의 논문이 토지개혁의 역사가 갖는 정치경제학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의견은 앞선 스승(先師)인 양마오춘(楊懋春, 1904-1988)의 대만 농촌사회에 대한 견해(본서의 제5장)에 약간의 보충을 겸한 것으로, 스승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전후 대만의 격변의 주축은 농업에서 상공업 사회로의 변화에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상문화의 전환과 연결된다. 전통 중화농업문화와 유가적 가치체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21세기를 향해 발전하는 대만은 유가사상적 전통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본서의 6번째 논문인 <유가 전통과 21세기 대만의 비전>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사색과 깨달음을 제시한 것이다. 필자는 전통 중국 농촌사회가 잉태한 유가문화가 21세기 오늘날의 대만에서도 여전히 그 가치가 있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한대(漢代) 이래 각종 어용유학(御用儒學)의 왜곡과 분쟁을 넘어서야 하며, 선진(先秦) 시대 공맹의 원시 교의로 돌아가, 유학의 새로운 정신적 원천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원천이 지닌 특별한 현대적 의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인과 사회가 하나의 연속체라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유기체론적 관점이다. 전자는 21세기 대만의 민주정치에 윤활유적 작용을 할 수 있다. ‘개인주체성’이 빠르게 성장하는 신시대 속에서 ‘개인’과 ‘사회’의 대립을 약간 줄일 수 있다. 후자는 21세기 대만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소외감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원시 유학적 정신은 모두 새로운 시대 대만의 발전을 위한 전통문화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고전적 유가의 풍부한 정신유산 중, ‘연속성의 관점’뿐만 아니라 ‘유기체론적 관점’은 현재 대만 민주사회의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다. 고전유가 중 심오한 시간 의식 또한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서의 7번째 논문인 <역사의식과 21세기 양안관계의 전망>에서 필자는 역사의식의 시각에서 현재 이 문제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급진통일’과 ‘급진독립’의 두 주장에 대해 분석하고, 양자 모두 역사적 사유에 있어서 맹점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급진통일파’는 아직 400년 이래 대만에 이민을 해 온 한인(漢人)들이 추구하는 자유 및 자주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급진독립파’는 최근 백여 년 동안 중국대륙의 인민들이 경험한 민족적 좌절과 이에 따른 민족주의 정서를 소홀히 하고 있다. 양쪽의 인사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유 상에서의 맹점이 그들로 하여금 대만과 대륙의 미래관계에 대한 사고에 엄중한 장애가 되고 있다.
필자는 ‘역사적/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여 이 문제를 생각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문제를 대만과 대륙 역사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생각하고 역사 사유의 폭과 역사의식의 깊이를 확장해야 한다. 시간의 깊이 속에서 ‘인민의 소원’을 존중하고, ‘통일/독립’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야 하며, 시간의 깊이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양안의 긴장이 높아진 시기에 어떻게 역사의식 중 인내력과 애정을 배양하고 이로써 양안관계를 해결할 것이냐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전후 대만은 50년의 안정기와 회복기를 거쳐 새로운 도약을 기다리며 21세기 새로운 문화를 건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 본서의 제8장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탐색이다. 우리들은 대만이 과거 수백 년 동안(특히 근 반세기동안)의 역사의 누적 속에서 새로운 문화 골격을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대만의 신문화는 ‘자아 의식’의 각성을 특징으로 한 강렬한 ‘역동성의 정신’(dynamism)을 충만하게 품고 있다. 문화 속에 각각의 영역 혹은 커뮤니티가 모두 그들의 의지를 현실 세계 속에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생명력이 충만한 활력은 4백 년 동안 선민들이 민남과 광동지역 각지에서 대만으로 이민을 와서 이 땅을 개척하고, 명정(明鄭) 시대 청조 정권에 항거하고, 일제시대 일본 식민당국에 항거하였으며, 전후 대만 경제발전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21세기 대만의 신문화의 정신적 자산은 과연 대만 문화 속에서 각 영역과 커뮤니티의 자아중심주의로 인해 상호 충돌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법치질서의 건립에 기반하여 중원 유가문화 속에서 ‘개체’와 ‘군체’의 화해의 이념을 흡수하고, 이로써 새로운 문화의 국면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현 단계에서 우리들이 직면한 중요한 선택의 기로인 것이다. 필자는 진지하면서도 낙관적인 믿음을 갖고 21세기 대만의 신문화가 함의하고 있는 개척 및 풍성함을 기대하게 된다.
황준걸 씀
2004년 4월 12일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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