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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0261059
· 쪽수 : 272쪽
책 소개
목차
히어 앤 데어(Here and There)
동국
라스트 북스토어(The Last Bookstore)
천천히 초록
로사의 연못
분홍에 대하여
압시드(Abcd)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로드
작품 해설 / 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동희는 밤이 되면 오랫동안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십 대 때 떠난 한국을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불분명한 것들이 오히려 진실 같았다. 캔 맥주나 방금 내린 커피가 손에 들려 있는 날은 더 오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밤안개가 자욱한 날들이 이어졌다.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그녀의 의식만이 분명했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그녀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딱히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는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게 뭉실뭉실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어디야, 올케? 안 와?”
“네? 어디를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올케의 목소리가 내게 어떤 아득함을 불러일으켰다. 변기통의 오물과 치약이 가득 묻어 있는 채로 굳어 있던 칫솔과 바닥이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들과 세탁기 안에 꾸덕꾸덕 말라가던 빨래들이 내게 살려달라며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을 때도 누구에게나 있는 건망증이라고 애써 태연한 척했었는데,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연희야!”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올케의 이름을 부르며 주저앉았다. 엘에이 한복판에서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이름이었다.
로사는 먼발치에 서서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의 집인 듯 스치고 지나온 제집을 바라보는 거였다. 푸른 저녁 빛이 여전히 집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창가에서 흘러나온 연주황 불빛들이 환했다. 불빛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했다. 하나하나가 꽃잎 같은 창이었다. 어디에서 봐도 완벽하게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예전의 집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 모든 게 농담 같았다. 그 어떤 설렘도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설렘은 사물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집이 아니라,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사라진 쓸데없이 큰 흰 박스가 그녀 앞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로사는 뭔가에 단단히 속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