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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91160270099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17-03-25
책 소개
책속에서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런 생각 따위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노란색 하이힐을 신고 빨간 미니스커트에 청록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안개가 자욱한 날에도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띌 듯한 모습이었다. 래브라도 안내견의 하네스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쓰고 있는 커다란 선글라스는 남들 눈에 띄는 게 두려운 유명 스타가 걸친 액세서리로 보일 터였다. 하나로 단정히 묶은 숱이 무성한 붉은빛 금발, 거의 비치다시피 하는 시스루 블라우스 아래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풍성한 가슴, 립스틱이 반짝이는 입술 위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그녀는 동정보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각장애인이었다.
내 인생은 아주 거칠게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나를 이민에서 생산된 결과물로 취급했지만, 사실 나는 무엇보다 문학적인 프로젝트였다. 다마스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의 경비원이 쓰레기통들을 비우다가 그중 하나에서 발견했을 때, 난 태어난 지 몇 시간 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도로 청소부가 지나간 후 누군가 나를 놓고 간 것이 분명했다. 문화부 담당관의 아내였던 엘리안 드 프레쥬는 나를 외교행낭으로 시리아에서 데리고 나올 정도로 나를 입양하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썼다. 나의 태생을 존중했던 그녀는 나를 지발이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지발라’는 쓰레기통이다. 그녀는 상상력으로 내 출생의 나머지 여백을 채웠다. 아내에게 간통죄라는 죄명을 씌워 일방적으로 이혼한 베두인족 족장을 나의 아버지로 만들었고, 부족에서 쫓겨난 그의 아내는 나를 프랑스 공화국에 생활 쓰레기로 위탁하면서 아들의 미래를 아주 훌륭한 운명으로 정해준 셈이 됐다. 엘리안 드 프레쥬가 쓴 소설 『쓰레기통의 아이, 지발』은 내가 열세 살 되던 해에 페미나상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나를 입양한 양모의 관대함과 친모의 희생을 바탕으로 시앙스포를 졸업한 베두인족 주인공인 나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소설 속 지발은 주머니에 졸업장을 챙겨 다마스로 돌아가서 아사드 대통령을 쓰러뜨리고, 이슬람 형제단에게 득 되는 행동 없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다. 그 후 아이 세 명을 남기고 438쪽에서 영웅으로 죽는데, 어느 날 세 아이 중 딸내미 한 명이 파리 주재 시리아 대사가 되어 필생의 작품을 완성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악몽은 다음 날 시작되었다. 상황에 적응하고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시력에 대한 분석과 시험을 하고, 얼마나 시력이 향상되었는지를 살펴본 후, 피욜 교수님은 내게 퇴원해도 좋다고 알려줬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을 때면 눈 안에서 작은 모래알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퇴원했다. 병원 주차장에서는 아빠가 쥘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보고 심히 당황스러운 행동을 했다. 개가 물어오는 공을 나에게 던진 것이다. 나는 펄쩍 뛰어 공을 잡았다. 아빠가 달려와 나를 꼭 껴안았다. 쥘은 순간 껑충껑충 뛰어오르던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입가에 굳은 미소를 띠고 두 눈으로 쥘을 응시했다. 그리고 쥘의 앞에 몸을 구부려 무릎을 꿇었다. “넌 정말 잘생겼구나, 쥘, 내 강아지, 정말 잘생겼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5만 배는 더 잘생겼어.” 쥘이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숨도 멈춘 채 쥘이 내 품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두 손을 크게 벌렸다. 한 10초 정도 몸을 떨더니 쥘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를 바짝 긴장시키고 내 주위를 도는 쥘이 보였다. 코를 킁킁거려 내 냄새를 맡고는 나를 핥으려 혀를 내밀었다가 막상 닿기 전에 다시 혀를 집어넣었다. 모순을 깨달은 쥘에게 복잡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와 눈빛과 몸짓을 스쳤고, 곧이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 알리스가 혼자 걸어가 자신의 도움 없이 문을 열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공을 잡으며,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것은 더 이상 알리스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