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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0783469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5-03-24
책 소개
목차
序說
1. 그날의 기억
2. 풍랑 속으로
3. 인연과 운명
4. 실습시간
5. 운명은 나를 믿지 않았다
6. 흰 눈 속으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철호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잠시 어둠 속에 묻힌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은하의 따뜻한 입술이 아직도 철호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스물둘 그때처럼……. 스스로 감정이 메마른 반백의 늙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철호의 가슴은 여전히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혼자 피식피식 웃다가 늘 하던 버릇대로 철호는 무심코 TV를 켰다.
‘오늘 하는 드라마가 뭐더라?’
그런데 첫 화면에 난데없이 대통령의 얼굴이 보였다. 얼른 채널을 돌렸다.
‘뭐야?’
또 채널을 돌렸다. ‘뭐지?’ 옮기는 곳마다 하나같이 그의 얼굴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담화를 하길래, 방송사 전체가 하나의 화면만 송출할까?’ 생각했다. 내용을 들어보니, 예산 타령, 탄핵 타령, 종북 타령 그가 늘 하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 같았다. ‘별 시답잖은 사람 다 있네.’ 생각하며, 철호는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가 냉수 한 컵을 따라 마셨다. 그때였다. 대통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뭐야, 비상계엄? 내가 잘못 들었나?’
순간 철호는 담화를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어 TV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국가 비상계엄령 선포’에 관한 것이었다. 담화가 끝나자마자, 화면은 곧장 국회로 이동되면서 전면적인 계엄 방송으로 이어졌다.
...
좁은 공간의 기억이 그의 목을 조여왔다. 손발이 묶인 채로 그냥 코에 물을 들이붓거나, 밀실 욕조 물에 수도 없이 머리가 처박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만하면 군홧발이 무릎과 몸뚱이를 짓이겼다. 고통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 후로도 그는 오랫동안 시시때때로 그때의 기억 속을 드나들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고, 45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겨우 상처밖에 남지 않은 흔적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45년 전의 기억처럼 돌아온 비상 계엄령 앞에서 그는 무기력해졌다. 비틀거리는 철호를 발견한 것은, 그의 뒷방에서 함께 살고 있는 만식이었다. 만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막 구운 고구마를 가지고 들어오다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철호를 발견했다.
“철호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만식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철호는 자신이 다시 한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음을 알았지만,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만, 만식아…….”
“그래, 철호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마, 만식아. 저거 뭐야? 비상계엄령 맞아?”
“철호야, 정신 차려!”
애타는 목소리로 만식이 철호를 달랬지만, 철호는 오른손을 덜덜 떨며 TV를 가리켰다. 만식은 그제야 TV 속보를 발견했다. ‘아, 그 때문이구나,’ 만식은 직감했다. 철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그 시절의 어두운 기억 속으로 빠져든 게 분명했다.
이윽고 만식을 쳐다보는 철호는 낯선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자보를 쓴 것은……. 대자보를…….”
“정신을 차려! 너는 태랑이잖아. 대학생 최철호가 아니라고…….”
만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급기야 꿇어앉는 철호의 모습을 보며, 만식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친구야,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어째 그 시절 망령에 다시 사로잡히는 게야!”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만식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강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철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내리는 날이거나, 짓궂은 날이 되면 어김없이 철호는 무릎 통증을 앓았다. 그것이 철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만식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얼마나 그 시절의 상처가 깊고 크면 이럴까?”
만식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철호가 불상을 보겠다는 핑계로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큰스님이 철호의 옷깃을 슬며시 붙잡더니 이야기했다.
“얘야, 스무 살 언저리를 조심하거라. 그때가 되어서는 피해 갈 수 없는 먹구름이 잠시 지나갈 때,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너를 위험한 곳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지금의 말을 잊지 말거라.”
“잘난 것도 때로는 죄요. 늘 조심하시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말고, 길 가는 이의 미래를 함부로 보지 마시오. 미래를 엿보고 이야기해 주는 것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라오. 나 역시도 당신에게 가르침을 주고는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소. 알겠소? 여기까지만 듣고 가시오. 그리고 기억하시오. 남을 위해 재주를 부리는 것은 좋으나, 무작정 미래를 봐주는 일에 대해서는 당신이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