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4224
· 쪽수 : 528쪽
· 출판일 : 2020-12-08
책 소개
목차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라가 패망했다.
순간순간 돌을 집어 머리를 찍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원망했던 오라버니는 우습게도 도끼에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 들었다. 그날 이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어머니는 병사들에게 겁간을 당하기 직전에 스스로 목에 은장도를 꿰뚫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어머니다웠다.
그 외의 가솔들 대부분도 대호국에서 온 병사들의 칼날에 무참히 짓밟혔다고 들었다.
일찍이 도망쳤던 왕은 개처럼 질질 끌려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렸다. 고고하던 왕비는 겁간을 당했고 왕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다. 후궁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개중 얼굴이 반반한 이는 저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10년을 냉궁에 갇혀 지냈던 가현은 나라가 패망한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것이 못내 우스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를 밧줄로 옭아매고 질질 끌고 가는 병사들은 나라가 무참히 찢어 발겨지는데도 실실거리는 가현을 미친년 보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10년을 냉궁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였다.
그들이 어떤 눈으로 쳐다보든 가현은 어차피 보이지 않았다.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진 가현은 그저 그들이 이끄는 데로 비틀비틀 걸어갈 뿐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대로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생에 아무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은 가현은 부디 이 길이 저승길이길 빌었다. 이승 따위 처음부터 미련 없었다.
‘운이 그 아이가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개처럼 궁으로 끌려 들어와 늙은 왕의 후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유모는 온몸을 벌벌 떨면서 가현의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가현은 그저 무감한 표정으로 유모를 보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저승에서 만나면 되는 게 아니겠는가. 가현은 유모가 방을 나서자마자, 소매에 숨기고 있던 은장도를 꺼내 자결을 시도했다.
(중략)
“전하께서 당도하실 때까지 얌전히 있어라.”
조금 전 저를 부축해 안아 들었던 이였다. 약간 마르고 길쭉한 눈매를 가진 사내는 가현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풀어 주었다. 오랫동안 가리고 있었던 탓에 눈이 시리도록 부셨다.
느리게 여러 번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그 사이로 흐릿하게 남자가 보였다. 가현을 못마땅하게 보던 남자는 그대로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멀거니 닫힌 문을 보고 있던 가현은 곧바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대로 있다가는 분명 겁간을 당할 게 분명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똑똑히 들었다. 저가 흑운왕이라는 자에게 팔려 왔다는 것을.
그의 밤 시중을 들 노비로 말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떻게 지킨 몸뚱이인데. 어떻게 지킨 것인데. 이대로 허무하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가현은 서둘러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망설이지 않고 목을 꿰뚫으려 하늘 높이 치켜드는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의 손에 손목이 붙들렸다.
“얌전히 있으라고 전했는데.”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남자의 등장에 놀란 가현은 그를 뿌리치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놓아라!”
버둥거리던 가현이 제풀에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그 위로 올라탄 사내가 가현의 손목을 꺾었다.
“아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무자비하게 꺾어 버리는 그의 손아귀 힘에 못 이겨 손에 힘을 풀자 은장도가 툭, 이불 위로 굴러떨어졌다. 사내는 그것을 집어 구석진 곳으로 던져 버렸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쳐 구석에 처박히게 된 은장도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가현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날 죽이……!”
악에 받친 얼굴로 소리치려던 가현은 그만 우뚝 멈추었다. 악을 쓰며 버둥거리던 움직임도 멈추었다.
“아.”
가현의 잇새로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가현의 까만 눈동자가 일렁였다.
말도 안 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녕…….
“운……?”
토해지듯 그녀의 입에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주변을 모두 얼릴 것처럼 냉랭하던 사내의 새까만 동공이 흐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껏 날 기억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향해 웃던 미소는 독이 서린 비틀림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