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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6006
· 쪽수 : 544쪽
· 출판일 : 2022-08-19
책 소개
목차
외전 2. 로렌츠 발렌시아
8. 주치의
9. 에르하르트
10. 후작 부인
11. 오펜하이머
12. 엘레나 오펜하이머
에필로그
외전 3. 루시아 데스테
저자소개
책속에서
곧, 에르하르트 저택에서 벗어날 것이다.
레나는 오직 그 목표에만 집중하려 애쓰며, 필리프의 널찍한 등만 보고 뛰었다. 아직도 지금의 선택이 옳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저택에 갇히게 된다면, 미쳐 버리게 될 것이다.
레나가 에르하르트 저택에서 마주한 건 지독한 현실뿐이었다. 그에게 듣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어떤 것도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녀는 카론의 기억을 불러오는 일에 실패했고, 카론은 그녀를…….
히잉!
그때 등 뒤로 거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한 남자의 음영이 숲 저편에서 나타났다. 누군지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레나는 젖 먹던 힘까지 숨이 차오르게 달려야만 했다.
허억, 헉.
뒤를 돌자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오는 달빛이 핏발 선 카론의 얼굴을 비추었다. 흡사 검은 짐승에게 쫓기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붉은 빛깔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제빛을 발하고 있었다. 맥동하는 모든 혈관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이 달린 두 사람은 산장 앞을 가로지르는 강을 목전에 두고 공포감에 얼어붙은 숨을 헐떡였다.
푸른 강물 위로 붉은 월파가 흐르고 있었다. 필리프가 그녀의 손목을 쥐고 그곳으로 잡아끌려 할 때였다.
“레나 크루거.”
어두운 숲 그림자 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총구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카론 에르하르트가 두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과 달리 숨조차 몰아쉬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기색이었으나, 그 살벌한 기운에 레나와 필리프 두 사람 모두 움찔거렸다.
“이리 와. 총알은 한 발이면 충분하니까.”
마치 마지막 경고와도 같은 침잠한 목소리였다. 레나는 굳게 달린 입술 사이로 한숨을 터뜨렸다.
“전 안 가요. 제 선택이 어떤지 알고 계시잖아요.”
“로렌츠 발렌시아는 네게 아무런 도움도 안 돼.”
할 수 있는 최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던 얼굴은 레나를 쥐고 있는 필리프의 손을 보자마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필리프와 그녀의 살이 맞붙어 있는 광경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감정이 살기가 도는 붉은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 기세에 필리프가 짓눌렸는지, 그녀를 붙든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레나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힘겨웠다.
“제가 남겨 둔 문서……. 후작님은 그게 저한테 어떤 의미일지 모르시겠지요.”
“…….”
“저는 더는……. 후작님을 견디기 힘들어요. 숨이 막혀요.”
그가 말해 주지 않는 진실을 혼자 두려워하고, 추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하고, 한 줌 애정을 느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였다. 그들은 다시 만난 순간부터 기억의 미로 속에 갇혀 눈 뜬 장님처럼 서로를 더듬고 있을 뿐이었다. 진실은 서로 저 너머에 숨긴 채.
서로를 모르는 채 기만적인 애정만 속삭이기엔, 그녀는 이미 어깨 위에 짊어진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친구도, 가문도, 엘레나 오펜하이머의 삶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닐 터였다.
카론이 아랑곳하지 않고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거부는 허락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그럴수록 레나는 필리프의 가슴팍에 등을 바싹 기댔다. 필리프가 한쪽 팔로 레나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자, 카론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래서 뒤에 있는 그 새끼가 네 선택이야? 아니면, 로렌츠 발렌시아가 널 지켜 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