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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65120573
· 쪽수 : 228쪽
· 출판일 : 2022-09-08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오랜 습관 하나쯤 곁에 두고 · 4
제1부 벚꽃이 지기 전에
딱 두 달··11 | 엄마 노릇··16 | 날마다 오월··20 |
회상··23 | 벚꽃이 지기 전에··27 | 내리추억··30
길 끝에서··33 | 끈··38 | 그래도 9월이다··43
옷 한 벌··46 | 설거지 유정(有情)··50 | 차 한 잔··54
제2부 눈물의 무게
편지 한 장··59 | 눈물의 무게··63 | 다시, 마당··67
작약꽃 피는 ··72 | 마음을 얻다··75 | 시간을 이긴 기억··78
감사함의 계절··82 | 들녘에 서서··85 | 엄마 생각··88
새를 날리며··91 | 달빛이 가장 좋은 밤··94 | 아버지의 집··97
제3부 오래된 마당
봄의 소리··103 | 할머니의 채송화··106 | 집 안에서··109
그 여름의 잔해··112 | 꽃물을 들이며··115 | 오래된 마당··118
가을이 보내는 벗··121 | 국화 옆에서··124 | 농부의 집··127
꽃 한 송이의 위로··130 | 시월의 뜰 안에서··133 | 가을아! 고맙다··136
제4부 눈물 짓지 않는
꽃다발을 안으며··141 | 온전한 봄··144 | 작은 농부들··147
터널의 끝··150 | 늘 사랑 속에서··153 | 여름. 방학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156
성장의 시간··159 | 눈물짓지 않는··162 | 한가위만 같아라··165
따뜻한 말 한마디··168 | 2월의 학교는··171 | 해를 보내며··174
제5부 시간의 문 앞에서
나는 소망합니다··179 | 특별한 보통··182 | 설날 단상(斷想)··185 | 하나면 된다··188
정신의 방··191 | 벗이 되고 곁이 되는··194 | 오월에 생각나는 사람··197
문장 한 줄··200 | 하루 한 시간 그리고 십 분··203 | 귤 한 봉지··207
체온을 담다··210 | 시간의 문 앞에서··213
발문 | 체험과 사유로 지은 따뜻한 집 · 반숙자 · 217
저자소개
책속에서
결혼하던 날은 아주 맑은 가을이었다. 아버지는 말끔한 양복에 윤이 나는 검은 새 구두를 신고 내 손을 잡아주셨다. 따뜻함으로 전해오는 당신의 체온 사이로 켜켜이 쌓였던 온갖 시간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길 위에서 고단했을 당신의 삶에 미안했고 보석처럼 빛나는 시절을 주셔서 고마울 뿐이었다. 당신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의 눈가도 뜨거워졌다. 아버지와 나는 우는 듯 웃는 듯 두 손을 꼭 잡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평생 아버지의 눈물이었으며 그 무게는 신(神)마저 나의 시력을 모두 가져가지는 못했다. 톨스토이가 그랬던가. 나의 생활 전체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매 순간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돌아보니 세월 앞에 원망은 사라지고 이해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련이 있었지만, 추억을 챙겼으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이 오래 걸렸지만 아버지의 노년이 쓸쓸할까 마음 쓸 줄 아는 어른도 되었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한 의사가 나와 일반실로 옮긴다는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들어간다. 고맙다. 창문 너머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던 봄볕에게 고맙고, 이미 등을 돌려 사라진 젊은 의사에게도, 거뜬히 지난 밤을 견뎌준 아버지에게도 고맙다. 모든 것이 다 고맙다. 그리고 어느새 새벽녘의 그 여자처럼 대기실 앞 긴 의자에 주저앉아 새우잠을 자며 밤새워 뒤척이던 조바심이 창밖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눈물로 내린다.
― 「눈물의 무게」 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랜만에 즐기는 만찬에 모두가 즐거운데 옆에서 묵묵히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슬며시 호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든다. 엄마의 이 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새벽에 일어나 한 줄 두 줄 쓰기 시작했단다. 자식들의 눈이 휘둥그레 초점을 잃었다. 지금껏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태껏 엄마에게 무심한 남편 그 자체였다. 자식들한테는 더없이 유한 분이셨으나 엄마에게는 늘 무뚝뚝하셨다. 더욱이 시(詩)를 좋아해 틈만 나면 집 밖에서 글벗들과 어울리니 집안일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어느 해인가 칠월 이맘때 암소가 새끼를 낳다가 사산(死産)을 했는데 그 뒷일을 모두 엄마에게 떠맡기고 당신은 또 사람들을 만나러 집을 비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더없이 암울했던 순간임을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함께 사는 내내 꽃 한 송이 받아본 적 없고 생일날 축하한단 말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으셨다니 그 삶이 오죽했을까.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 당신의 삶을 떠올리면 더없이 마음이 아리곤 했다.
편지로 대변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구구절절(句句節節)인데 남편도, 자식도 놓칠 만큼 이제 엄마의 기억은 하얗게 길을 잃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밖에서의 시간을 줄이고 엄마와 많이 함께했더라면, 가슴 저 밑바닥에 있는 깊은 마음을 자주 꺼내 표현했더라면 엄마의 기억은 덜 아프지 않았을까. 그러나 인생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얼마나 부질없는지. 남편이 전하는 생애 첫 편지 한 장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지금 치매와 마주하고 계신 엄마 모습에 자식들은 울었다.
― 「편지 한 장」 중에서
올해는 텃밭에 아이들과 직접 땅콩을 심어보기로 했다. 우연한 기회에 지인에게 얻은 땅콩 씨앗 한 줌을 물에 하룻저녁 담가 충분히 물기를 먹인 다음 아침마다 마시는 우유팩을 화분 삼아 씨앗을 심었다. 일인 일 화분을 갖게 된 아이들은 저마다의 화분에 애정을 갖고 관심을 표했다. 교실을 들고나며 이제나저제나 언제쯤 뾰족하니 눈을 내밀까,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어느 드라마에서처럼 하루에 예쁜 말을 열 개씩 해주면 씩씩하게 잘 자랄 것이라고 했더니 어떤 아이는 이른 아침 등원하자마자 땅콩이 잠자고 있는 우유팩 화분 앞에 와서는 ‘안녕! 잘 지냈니?’ 하며 눈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룻밤이 지나고 이틀 밤이 흐르고 몇 날을 보내고 나니 드디어 흙을 뚫고 땅콩 새싹이 나왔다. 아기 숟가락 같은 동그란 떡잎을 앞세워 연둣빛 색을 입은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잎에 색을 덧입히며 튼튼하게 자라주었다. 200㎖ 작은 우유팩에 땅콩 새싹을 키우는 과정은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내게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아주 작은 콩알 하나를 어두운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내는 과정이 나름대로 한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뿌듯함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유월 첫 주, 절기상 씨앗에 수염이 달린 곡식을 파종하기에 알맞다는 망종(芒種)에 맞춰 땅콩 새싹을 텃밭으로 옮겨 심었다. 아이들의 고사리손이 모여 고랑에 미리 구멍을 내놓은 사이로 저마다의 땅콩을 심었다.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행여나 다칠세라 새싹을 아기 다루듯 했다. 흙을 돋우고 물을 주고 잘 자라야 한다며 당부까지 하고 돌아서는 모습이 유월의 햇살만큼이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 「작은 농부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