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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한국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91165346614
· 쪽수 : 276쪽
· 출판일 : 2022-12-12
책 소개
목차
제1장
기억의 흔적
타인과 그의 뱀 그림자
제2장
CCTV
분노할 일은 생각보다 많다.
제3장
둘러싼 모든 것들
미술관 작업실
제4장
불에 탄 숲
일상의 행복
제5장
우리는 모두 죽는다
마그리트의 껍질
에필로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책 속에서]
‘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복도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한강 하류의 갈대가 무성한 기슭에서 발견돼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땐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왼쪽 무릎 관절과 9번, 10번 갈비뼈 골절, 뒤통수의 깊은 상처, 저체 온에 의한 쇼크, 의식 불명. 최악의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천장의 하얀 형광등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는 정육점에 전시된 포장육처럼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뼈는 붙었고 근육은 다시 탄탄하게 힘을 얻었다. 뒤통수의 수술 자국도 잘 아물었 다. 오늘은 다리 깁스를 풀었다. 다음 주면 퇴원이다. 모든 것은 산책하는 절름발이 철학자처럼 천천히, 하지만 견고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가지만 빼고는…….
사고가 있기 전 기억은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두개골 속 말랑말랑한 대뇌피질이 마치 해면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서른둘 인생에서 2년이 송두리째 지워져 버렸다. 사라진 기억 속에 소중한 것이 있지는 않았을까. 날 지탱하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햇볕이 따듯하게 데워놓은 병원 벤치에 앉아 온종일 생각했다. 기억이 있었을 자리에 온갖 상상과 추측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상의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몇 년째 계속 사는 투룸, 다니던 직장, 하던 업무, 동료들, 늘 들르는 편의점, 주말이면 산책을 하는 공원과 뒷산, 출근 때마다 마주치는 옆집 여자 얼굴, 사고가 나기 전 구매한 노트북의 가격과 판매점 사장의 얼굴까지도 또렷이 생각났다.
- 1장. 기억의 흔적
말을 잠시 멈춘 그가 ‘기억 노트’라고 적힌 노트 한 권을 내앞으로 내밀었다.
“일상 중에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여기에 메모하세요.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날의 날씨, 출근할 때의 기분, 읽은 책, 본 것, 우연히 만난 사람에 대한 느낌,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뷔, 갑자기 기억나는 것. 뭐든 자유롭게 쓰세요. 매일 쓰면 좋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툭툭 떠오르는 단편적 기억들을 편하게 적으세요.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온전한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술 화법 중 포인티지라는 것이 있어요. 프랑스 화가 쇠라 (Georges Seurat) 가 창시한 것이에요. 화가가 팔레트에 색을 혼합해 원하는 색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색깔 점을 직접 캔버스에 찍어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알록달록한 의미 없는 점들의 집합이지만 멀리서 보면 완성된 하나의 그림이 되죠.”
“…….”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방법을 이용합니다. 전문용어로 항시적 관찰 기록 기법이라고 해요. 소소한 일상의 변화를 계속 적다 보면 거기서 사라진 기억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거든요.
의미 없어 보이는 무수한 점들이 그림을 만드는 것처럼.”
기억 노트는 주머니에 넣기 좋은 크기였다. 표지에는 푸른 사과가 그려져 있다. 배경이 파란 하늘과 구름이라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는 반쯤 벗겨진 상태로, 껍질이 공중 에서 지상으로 흘러내렸다. 드러난 사과 속살은 노란 과육이 아니었다. 안은 텅 빈 상태였다. 노트를 펼쳤다. 흰 바탕에 줄만 그려져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 1장. 기억의 흔적
“기억이라는 것, 참 재밌어요. 왜곡된 기억은 사람을 슬픔에 젖은 개그맨처럼 만들거든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요양원에 온 지 6개월 정도 된 70대 할아버지 환자가 있었어요.
신체 건강은 비교적 좋았지만 독특한 이상 증상을 보였죠. 아침에는 어린아이, 점심에는 청년, 저녁에는 중년으로 지내다가 자기 직전에는 노인이라고 믿는 증상. 그걸 스핑크스 증후군이 라고 하더군요.”
스핑크스 증후군이라. 누가 처음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명칭은 없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전직 대기업 부장이었는데 사고로 일가족을 한꺼번에 잃었어요.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와 잠든 가족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불까지 질러버렸대요. 남겨진 할아버지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다 결국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고 요양원까지 오게 된 거죠.”
“참 기구한 삶이군요.”
“그분을 돌보게 되면서 난 하루를 70년처럼 지냈어요. 어린 아이로 사는 아침에는 함께 그림도 그리고 장난도 치면서 놀아 드리고, 낮에는 젊은이로 변한 할아버지와 청춘의 고민을 나눴 어요. 취업 상담이나 첫사랑의 열병에 관한 것들을요. 그러다 저녁 무렵에는 자식들의 사춘기 고민과 새파란 직장 후배가 어떻게 자기한테 이럴 수 있느냐 같은 하소연을 들어야만 했죠.”
“희로애락이 하루면 끝나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다음 날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문제지요. 잠들기 전,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기억나요. ‘ 내 삶은늘 고통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아픈 기억이 깨끗이 지워졌으면 좋겠어. ’ 소원대로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다시 태어났어요.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민이 기다리는 시작점에서.”
“…….”
“우리 모두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종종 그런 공상을 해요.”
- 1장. 타인과 그의 뱀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