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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5347246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3-04-30
책 소개
목차
1부
2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제 이름은 블레이크이고 여러분이 이번에 듣게 될 수업은 ‘사랑의 기술’입니다. 강의명이 참 로맨틱하죠. 사실 처음엔 ‘빌 어먹을 B급 연애 탈출 백서’였는데 보기 좋게 까였어요.”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혹시 지금 연애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 하는 사람, 손?”
블레이크가 오른손을 얼굴 위로 짧게 들어 올리며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대충 봐도 100여 명이 들어선 것 같은 대강당에 위로 올라간 손은 20개 남짓이었다.
펜을 쥔 휘현은 종이 위에 작게 ‘도하’라는 이름을 썼다 지웠다.
“흐음, 손 내려 주시고. 이번 수업을 통해서 애착이론을 공부 하고 데이트에 실천해보면서 행복한 연애 고수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보니까 저만의 목표는 아닐 것 같네요.”
교수가 하는 말에 학생들의 작게 웃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렸다.
“그리고 알다시피 내 수업에서는 조금 특별한 혜택이 있죠.
불안정 애착 유형 친구들이 마지막 수업 테스트에서 결과가 안정형으로 나올 경우 무조건 점수는 A+입니다. 출석, 에세이, 중간・기말고사 성적에 상관없이. 근데 생각보다 이런 베네핏을 가져간 친구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블레이크가 아쉬운 듯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자, 그럼 테스트를 해봐야겠죠?”
블레이크는 애착유형테스트 용지를 제일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나눠주고는 뒤로 넘기라고 했다. 또각또각 울리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에 이상하게 휘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테스트 결과를 맨 앞에 적어서 제출하고 나가면 됩니다. 아, 그리고 지난번에 말했듯이 보름 뒤에 에세이 과제 제출하는 거잊지 않도록!”
그녀의 말에 종이를 받아 든 학생들이 빠르게 펜을 꺼냈다.
<성인 애착 유형 검사>라고 적힌 맨 앞면을 넘기자 수많은 문항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휴……” 짧게 한숨을 내쉰 휘현도 서둘러 문항에 체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휘현이 마지막 문항을 체크 하고 나니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휘현도 모든 문항에 따른 합산을 마치고 본인의 유형을 확인했다.
공포-회피(Fearful-Avoidant)
순간 휘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단어만 봐도 썩 좋은 유형이 아니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휘현이다. 엄지와 중지 끝을 관자놀이에 가져가 지끈 누르며 휘현은 다시 점수를 하나하나 계산했다.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공포와 회피 숫자가 심각하게 높게 나와 부인할 수조차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휘현이 종이 맨 앞면의 공포-회피란에 체크했 다. ‘가만, 아까 불안정형이 마지막 수업 때 안정형으로 나오면 A+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기회인 건가?’ 휘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펜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도 잠시,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학생들 소리에 서둘러 의자를 길게 뺀 휘현이 결과지를 쥐고 강단에 서 있는 블레이크 교수에게 걸어 나갔다. 휘현을 본 블레이크 교수가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낯선 휘현이 바로 시선을 내리깔고 결과지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간결하게 말을 건넨 블레이크 교수가 슬쩍 맨 앞 페이지에 적힌 결과지를 눈으로 훑는 게 느껴졌다. 올라간 입꼬리가 걱정 스레 내려오는 것까지도.
“저는 감정을 감추는 여자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사랑에 빠진다는 게 서로 진실한 마음을 나누고 또 상처받더라도 나를 내어주는 게……” “그러니까요. 왜 나를 상처받게 내버려 둬야하죠?”
말을 자르고 되묻는 휘현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그런 휘현을 보는 이든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주눅 들지도 눈치 보는 것도 없이 평상시대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휘현과 나누는 토론을 흥미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이든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꺼이 상대에게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허용도 없이 사랑이 가능한 건가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사랑인지조차 의심 스럽다는 거죠.”
“가능하죠. 관능적인 모습으로 호감을 사서 사랑을 시작한뒤 서로 독립성과 거리를 유지한 채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 되니까요!”
휘현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낭만에 젖은 듯 말했다.
“그럼…… 가면은 언제 벗어요?”
여전히 휘현을 주시하며 이든이 물었다.
그 말에 휘현은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가면? 내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연인 관계가 가식이라고?’ “서로의 진짜 모습을 용기 내서 보여주고 알아가면서 친밀감이 생기는 거 아닌가요? 사랑에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게 저는 이해가 안 돼서.”
이든이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휘현은 갑자기 목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든의 입에서 나온 ‘용기’, ‘친밀감’, ‘진짜’라는 단어가 불편했다. 닭살이 돋는 것처럼 피부가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가슴도 답답해서 숨이 잘쉬어지지 않았다. 휘현이 다시 반박하려 숨을 들이쉬는데 주디가 먼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