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91166850493
· 쪽수 : 1040쪽
· 출판일 : 2021-08-27
책 소개
목차
머리말
1부 존재론
1. 인간 본성으로서 자연
자아(自我)의 존재
자아(自我)의 유한성과 초월성
인간의 자유의사
인간본성의 손상
존재와 소유
2. 신의 존재
존재론의 이해
우상(偶像)
현대의 신(神)
신(神)과 벌(罰)
신(神)의 은총(恩寵)
신(神) 앞(前)에 서서
이단(異端)과 정통(正統)
신앙의 의의
성(性)과 삶
무명(無名)
신(神)과 자기
3. 신의 작동원리
종교와 정치
신(神)과 국가
신앙과 경제
종교와 사업(Business)
4. 신의 존재형식
창조적인 삶
존재와 제도
관습
반체제·반권력·반권위의 사상(思想)
2부 자유론
1. 자유의지로서의 인간
2. 자유의 의지
자유의 타락
3. 자유와 자연
4. 자유의 인식
공감(共感)
5. 자유의지로서 선악
선(善)
악(?)
6. 자유로운 사유
자유와 정신력
7. 자유와 시간
신화와 시간
8. 자유의 존재와 공간
9. 자유의지로서의 자명성
10. 자유의 논리
자유와 종교적 열광
11. 자유의 상대성
3부 윤리론
1. 윤리론의 논의 필요성
윤리론의 기초이해
한국인의 마음(心)
2. 죄와 윤리
죄와 벌
죄를 망각한 시대
3. 의지와 윤리
현대사회의 위기상황
의지(意志)와 욕망(欲望)
4. 노동의 윤리
노동의 윤리와 철학
창조적 인생과 삶의 목적
5. 교육과 윤리
사람의 길(人道)
자신감과 아집
자각과 자아
6. 생명과 윤리
애정(愛情)과 증오(憎?)
성(性)과 윤리
7. 종교와 윤리
인생이란?
마음의 병
자의식
사람의 본성의 변화
후회(懺悔)
8. 사회와 윤리
가(家)와 사회의 역할
권선징악(?善懲?)
도덕
정의와 폭력과 법
9. 사유와 과학의 윤리
자기
절대와 상대
윤리와 과학철학
4부 국가론
1. 국가론 프롤로그
2. 국가의 정의와 논리
국가의 정의
국가의 논리
3. 주권과 독립 그리고 상징
주권과 독립
국가와 상징
권위와 상징
4. 국가의 폭력과 이념
국가와 폭력
국가의 이념
5. 국가체제와 정치체제
국가체제
정치체제
6. 경제논리와 경제체제
경제 논리
경제체제
경제의 목적
경제의 본질
경제와 국가
경제와 정치
경제주체
경제주체로서 산업
가치의 창조
시장구조
7. 법의 개념과 논리
법의 개념
법의 논리
8. 헌법의 체제와 법의 체제
헌법의 체제
법의 체제
9. 법의 기초와 민주주의의 논리
법의 기초로서 논리
민주주의의 논리
10. 국가와 교육 그리고 윤리의 논리
국가와 교육
윤리의 논리
11. 정치와 국민과 자유
정치와 국민
국가와 자유
정치가와 신념과 말
12. 전쟁과 평화
전쟁의 원인
전쟁의 영향
전쟁의 성격
전쟁과 평화와 신(神)
13. 국가론 에필로그
찾아보기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리말
책을 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우선 내 글, 아니 내 생각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텐데 마치 진리인 양 떠든 것은 아닌지 더럭 겁이 난다. 세상의 판관들이 두들겨 팰 것으로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알이 되기 전에 숙성 기간을 참지 못하고 그저 초조함 때문에 암탉의 배를 갈라 생기다 만 알을 꺼내버린 것은 아닌지, 그 무모함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원고지 5천 매가 훨씬 넘는 분량의 긴 책인데 문장은 최대한 단문으로 쓰고자 하였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호흡이 긴 지독한 만연체(蔓衍體)의 법률문장이 익숙한 나에게는 첫 도전이었다. 고백하건대 논리적인 정합성이 매우 부족한 문장들이 주련(柱聯)처럼 죽 늘어선 것 같기도 하다. 어설픈 감정만 내뱉는 예어(?語)가 된 듯하여 무척이나 부끄럽다.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非文)도 있으리라. 가차 없는 질정(叱正)을 내려 주시라.
현대사회에서는 철학이나 윤리학이 맥도날드의 햄버거나 스타벅스의 커피 한잔 정도의 가치도 없다. 요컨대, 정신의 고귀함에는 전혀 화폐가치가 없다. 그러나 외람되게도 나는 이 정신의 자식들을 내가 죽거든 내 관속에 넣어 저승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다. 먼 훗날 화석언어가 되어 내 관을 발견한 고고학자가 해독해 주리라 믿는다. 그때 여기 쓰인 글이 우리 시대 정신의 흔적으로 남기를 바란다면 허무한 꿈일까?
이 책에서 내뱉은 나의 말(言) 빚이 냉소적인 비난에 그치고 생산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 것 또한 나의 천학비재(淺學菲才)의 탓이라. 나는 경세가(經世家)도 아닌바 그저 제 잘난 맛에 삼촌설(三寸舌)로 지껄인 허무한 지적 유희로 그침을 부끄러워할 뿐이다. 다만, 내 글을 읽은 독자가 한 명이라도 내 생각에 동의를 하거나, 공감을 느끼거나, 이 책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면 나는 이 책을 저술한 보람이 있다고 본다.
만 6년 동안 숙성시킨 내 생각의 편린(片鱗)들이 잘 설계된 도면에 알알이 베어 전체의 구도를 짜임새 있게 지탱해준다면 좋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허무한 생각이 든다. 어느 덧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세월 때문이리라. 이제 망망대해로 떠내려갈 내 말(言)들을 놓아 주기로 한다. 이 책에서는 철학, 역사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논리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 나의 40년 책 읽기에서 얻은 얕은 지식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다. 부제에서 드러난 것처럼 아무런 틀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주워 모은 생각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은 스포츠도 서툴다. 축구는 즐겼으나 멈춘지 오래고 골프도 더디 는다. 운동신경이 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서툴다. 몇 년째 서예도 늘지 않는다. 나는 항상 늦깎이다(slow starter). 운전도 늦게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잘하는 것은 꾸준함이다. 포기하지 않음이다. 나는 이 원칙을 평생 고수하여 왔다. 이제 아내가 그만 펜을 놓으라고 야단이다. 나는 이 책으로 6년의 세월을 잃었고, 1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덤으로 얻었다. 허리 인치가 늘어난 것도 원치 않은 소득이다.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아빠로서 딸들에게 미안하다. 인생의 끝자락에 계신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한 불효를 이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신축년 초여름
서운면 양촌리 우거(寓居)에서
1부 존재론
1. 인간 본성으로서 자연
자아(自我)의 존재
우선 나는 누구냐는 이런 질문을 제시한다. 그러면 ‘나’란 사람은 누구냐? 내가 신장(身長)과 체중이라는 신체적 특징 그리고 희로애락 같은 나의 심리적 현상을 가지면서도 그런 것은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다. ‘나’란 모양이 없어서, 외계의 사물처럼 기사에서 언급도 하지만,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그렇게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새삼 반성하고, 학문적으로 파악하자면, 심리학이나 여러 가지 과학이 나오겠지만, 그것은 본래 당연히 ‘나’란 사람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손으로 뜬다고 해도 그 손에서 줄줄 새는 물처럼 그런 독자의 존재이다. 그 한도에서 ‘나’란, 인간의 존재란, 어떤 의미에서 한 개의 수수께끼이다.
참 ‘나’를 찾기 위해 거기에 신비로운 것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인 ‘나’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라는 것은, 여러분은 지금이라는 시간을 파악할 때는, 지금은 이제 없어지고 있다. 지금은 절대로 대상화 하여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시간은 파악할 수 없지만, 여러분은 아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모르면 자신의 사라진 과거에 책임을 맡길 수는 없다. 반성하고 대상화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본성과 융합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파악한다는 뭔가 이런 별종의 인식능력이 사람에게 갖춰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말이 되겠지만, 오히려 여러분은 혼란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질문은 무엇인가? 질문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한다는 것, 묻겠다는 것은 사실 인식하는 대상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지해(知解)지해(知解)를 요구하고 묻겠다는 자세가 가능한 셈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은 열리리라”는 말이 있지만, 탁 쳐야 문은 듣는 것이다. 묻겠다는 것 중에 사실은 답이 절반이 들어 있다. 여러분은 그 답을 선행적으로 반은 알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파악이 되지 않는 ‘나’란 직관적으로 자신의 본성에 융합한 것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과 같은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와 사물은 로마법로마법에서 말하는 대응이 아니다. 사물처럼 대상화할 수 없는 각별한 인격(persona), 이른바 존엄을 구비한 존재다움은 직관적으로 여러분이 안다. 그래서 개인을 사물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도구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런 존엄을 가진 존재임을 우리는 저절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自我)의 유한성과 초월성
이러한 존엄성은 특히 영혼의 정신부분에서 유래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신체와 육체를 갖추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그 육체에 따른 생로병사라는 것이 늘 따라다니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 때문에 고통을 불러서 가까이 오게 하는 일도 있고, 별똥별이나 지진이나 쓰나미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나쁜 짓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 해악을 입거나, 이러한 부조리한 피해라는 것도 있고, 인간의 세상은 어쨌든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신체를 갖고 있다는 제한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만악의 근원에는 인간의 본성은 실은 어느 정도 손상되지 않는 완전하지 않은 실상이 있는 것 같다. 즉, 신은 존재의 완전한 현상으로 충실하기 때문에 존재의 결여한 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은 존재의 완전한 충실을 갖지 못하고 일부분 그 허무를 안고 있다. 그 허무 속에서 여러 가지 인간의 제한성, 한계성, 그리고 비극이 나온다. 독자는 이것도 저절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를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 유한하다는 것을 안지가 오래되었다는 것, 인간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은 ‘한도가 없다’고 하는 사태를 반대편에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끝이 없다는 것을 알면 어떤 무한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 이것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다는 의식은 원래 나오지 않을 것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뭔가 무한한 것에 대한 경향이라는 것이 저절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소 건강하다면 그런 것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겠지만, 긴 인생 속에서 죽음에 직면하는 병을 앓거나 혹은 사업에 실패하고 낙오하여 삶의 대열까지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으면 다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 나타난다. 그때 평소에 생각지도 못한 것이 갑자기 자신의 의식의 전면을 차지한다. 그렇게 한 때에 자신이 안고 있는 허무, 고통, 이를 메우기 위해서 무엇인가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 이런 것을 요구하다가 이러한 경향성이 저절로 생긴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을까 의심한다. 즉, 인간은 본성 때문에 무화(無化), 허무화(虛無化)의 경향을 안고 이를 끊임없이 물으며 이를 초월하고자 지향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거꾸로 나의 존재는 이제 초월자가 되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초월자초월자로 한정되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식으로 포착하게 된다. 즉, 내 존재는 무한자로부터 지금 이 시각에 보낸 것이고 이런 것을 선물로 이해한다. 불가항력의 현실을 해결해 달라고 촉구한 끝에 마침내 통한다고 할까? 내몰린 곳에서 마음을 홀연히 벗어난다. 이는 회심(回心)이고 아마 불교에서도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공통의 자세가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