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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7030801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23-07-14
책 소개
목차
서(序)
제1장
봄날의 기억 / 마사코 / 운명 / 사랑을 품었다가 / 촛불을 흔드는 바람 / 물 위의 도시 / 유럽 여행 /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아카사카, 그 집의 추억
제2장
떠도는 영혼 / 고려신사 / 흐르는 물은 길을 찾는다 / 잃어버린 집 / 그리운 얼굴
제3장
우크라이나 여자 / 아버지 / 조국 / 액자 속에 갇힌 세월 / 그 아이 / 봉사자들 /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 험로 / 또 다른 계절 / 오정수와 해리의 역사 / 줄리아의 편지
결(結)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날씨가 참 좋지요?”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사코를 한참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네, 날씨가 좋군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다 마사코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스며 있는 어색함과 쓸쓸함이 오히려 측은하게 느껴졌다. 학업을 핑계 삼아, 어린 나이에 조국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 쓸쓸한 웃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인들 일본 여인을 배필로 맞으리라는 생각을 상상으로나마 했을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된 그는 절제된 말투와 행동으로 군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둘이 있을 때는 부드러운 눈빛을 가진 외로운 청년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융화를 위해 진행되는 정략결혼이었지만 마사코는 그를 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온화하고 마음 따뜻한 청년 이 은에게 시집가는 것이야.’
마사코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일렀다. 처음 만나는 자리라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마사코는 그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온화하고 따뜻하며 말을 아끼는 사람. 마사코에게 이 은은 그렇게 각인되었다.
지진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식량 공급이 어려워지고 인심은 극도로 나빠져서 도둑이 들끓었다. 계엄령이 선포됐다. 조선인들이 식량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인다,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뿌린다…….
소문은 진실보다 더욱 진실해 보였다.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사린다. 우선은 내가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폭도에 가까웠다. 어이없는 일들이 대처할 겨를도 없이 연이어 터졌다.
“조센징을 싹 쓸어버리자.”
“조센징은 악마의 화신이다.”
성난 일본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닥치는 대로 조선인 사냥을 한다고 했다. 합당한 이유나 논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조선인이 보이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삽으로 쳐 죽이고, 때려 죽이고, 밟아 죽였다는 이야기들이 섬뜩하게 흘러 다녔다.
“어찌 조선인들을 이리 못살게 구는 것이오.”
무겁게 말을 뱉는 그의 얼굴은 침통했다. 마사코와 함께 신변의 위험을 핑계 삼아 궁내성으로 피난했지만 그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또다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