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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67526427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25-05-30
책 소개
목차
1부 사람과 사람
두 세계의 탄생
왜 태어났니
도미에의 그림자
아술의 경우
케빈의 경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부모님, 당신을 고발합니다
2부 동물과 사람
달리기의 시간
노찬성과 에반
‘비명(悲鳴)’을 찾아서
슬픈 불고기
언더 더 스킨
미술관 옆 동물원
3부 사물과 사람
할머니 방
다락방과 편지
마당
말하는 사물들
나를 닮은 사물들
어머니의 단화
그 고장의 이름
4부 예술과 사람, 혹은 사랑
글렌 굴드가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생명 예찬과 인간성 상실
저녁 여덟 시의 정전
당신을 맡고 싶다
돌봄
스위스행
에필로그
저자소개
책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한 개체를 이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일이면서 가장 특별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일이다. 생명(삶)을 출산하는 건 동시에 죽음도 출산하는 것이니까. 한 개체가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개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슬픔, 고통, 좌절을 만들어 내는 일이기도 하니까.
자녀는 부모에게 물을 수 있다. 왜 나를 낳았는지. 하지만 그 전에 부모가 되고자 하는 이는 스스로 물을 수 있다. 왜 아이를 낳으려는지. 나 아닌, 나와 다른, 내가 될 수 없는 존재를 왜 태어나게 하려는지.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맞이할 기쁨과 행복, 고통과 슬픔을, 삶과 죽음을 왜 세상에 내어놓으려는지.
반려동물을 맞이한다는 건, 늙음과 죽음과 슬픔이 적힌 편지를 미리 받아 드는 일과 같다. 그 편지의 첫 문단엔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겠지만 결국 마지막 문단엔 죽음과 슬픔의 말이 쓰인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존재는 세상에 남겨진 자에게 슬픔을 남긴다.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미안함도 남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세상을 떠난 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책임을 다하며 그가 만족할 만큼 잘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남겨진 자는 세상을 떠난 자에게 언제나 미안하다. 그리고 언제나 후회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주어진 ‘책임’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겨우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충분히 슬퍼하고 용서를 구할 준비가 되었을까. 혹은 그것이 준비가 가능한 것이기나 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
왜 어떤 동물은 전 지구적 관심과 연민을 받고 왜 어떤 동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음식이 될까. 왜 어떤 죽음은 슬픔이 되고 왜 어떤 죽음은 쾌락이 되는 걸까. 단지 그것이 야생 동물과 가축이라는 차이 때문일까.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의 원본인 귀여운 동물들과 장엄한 자연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동물들은 그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소비되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가축은 오직 고기로 대상화되어 있을 뿐 어떤 사랑도 연민도 받지 못한다.
정말 서글픈 일은 그들이 단지 죽어서 누군가의 음식이 된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더 큰 슬픔은 그들이 누군가의 음식이 되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다는 데 있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맛 좋은 고기가 되기 위해, (이제는 더 이상 필수 영양소의 섭취가 아닌) 누군가의 감각적 쾌락을 위해 태어나고 사육된다는 데 가장 깊은 슬픔이 있다. 기쁨과 슬픔을, 행복과 불행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공감하고 소통할 줄 아는 존재가 토막 난 살덩이가 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로 태어나고 사육되고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 실은 가장 큰 비극과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