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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91168125018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22-11-03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1장_전면 개방까지 83년
어느 날 갑자기 | 청와대 터 내력 | 청와대라는 이름 | 전면 개방까지 83년 | 경무대가 고향인 김경숙 씨 | 백악산 넘어온 무장공비들 | 바리케이드 철거하던 날 | 8000번 버스, 01번 버스
2장_걸어서 경내 한 바퀴
본관 귀마루에 앉은 잡상 11개 | 게양대에 봉황기가 걸리면 | 말도 탈도 많은 본관 위치 | 2022년 5월에 멈춘 달력 | 대통령 6명이 거쳐 간 자리 | 200살 넘은 소나무로 지었다 | 세상에 이런 풍경 | D등급 받은 비서진 공간 | 춘추관을 휘젓고 다니는 의문의 존재 | 서별관과 연풍문에 드리운 그늘 | 익산에서 가져온 13미터짜리 화강암 기둥 | 왕비가 되지 못한 왕의 어머니들 | 전두환 골프연습장, 박정희 기마로 | 정문 양식을 둘러싼 논란 | 마지막에 열린 경복궁 북문
3장_나무와 풀의 천국
모가지를 떼러 왔수다 | 철통 경계가 낳은 아이러니 | 관저를 둘러싼 낙우송 | 나무를 보면 대통령이 보인다
4장_베일 벗은 문화유산
호기심 많은 엉뚱한 사람들 | 천하제일복지 바위의 비밀 | 드넓은 터에 한옥은 세 채 | 경내 한옥 두 채가 왜 전남 영광에 | 상춘재 천록은 쌍둥이였을까 | 고향이 경주인 부처가 청와대에 온 사연
5장_사연 많은 예술품
사들인 그림, 상납한 그림 | 공간 따로 작품 따로 | 비서실 따로 경호처 따로 | 대통령을 그린 화가들
6장_0.725초의 승부, 경호처
어마어마한 물을 쓰는 곳 | 경복궁 안에 숨은 탱크 | 두 번의 쿠데타 | 권총 유효사거리 52미터가 경계선 | 당하면서 메운 빈틈 | 0.725초의 승부 | 낱낱이 공개하는 업무비
7장_동네 한 바퀴 - 청와대 서쪽
등산복 입은 아줌마 아저씨 부대 | 고갯마루에 종로경찰서장 동상, 청운동 | 하루아침에 사라진 시위대, 신교동 | 부역자들의 흔적, 옥인동 | 포개 놓은 바위 둘, 그가 죽은 자리 궁정동 | 강제로 빼앗아간 효자동이발소 | 공부하다 말고 꽃 들고 뛰어나갔다, 창성동 | 노블레스 오블리주 통인동 128번지 | 3층 건물인데 지하가 16미터, 통의동 | 중국 자본은 왜 서촌 성결교회를 탐냈을까 | 사직단 향나무는 담장 안에 있었다, 사직동 | 수모당한 인왕산 치마바위
8장_동네 한 바퀴 - 청와대 동쪽
한국 마라톤의 숨겨진 성지, 삼청동 | 10분이면 걸어서 동네 네 곳을 지난다 | 10명 중 6명을 서울대 보낸 학교가 있던 화동 | 대하소설 써도 될 국립현대미술관 자리, 소격동 | 20년 넘게 비어 있던 땅 3만 4200제곱미터, 송현동
9장_길 아래 물길이 있다
청계천이 시작하는 샘 | 물길이 20개가 넘었다 | 길 가운데 사각철판 | 청와대 동쪽 - 삼청동천 | 청와대 서쪽 - 백운동천 | 청와대 남쪽 - 대은암천 | 맨홀 뚜껑 박물관
10장_백악산 가는 길
움푹한 확으로 흘러내리는 물 | 18.8킬로미터 한양도성의 원점 | 8부 능선에 튀어나온 거북머리 | 갑자기 화제가 된 절터 | 북쪽으로 난 두 개의 문
11장_청와대서 용산까지
한양천도의 정치학 | 짜고 친 고스톱 | 수도를 옮기는 몇 가지 이유 | 서울 한복판에 대일본이라니 | 땅의 팔자 또는 운명 | 용산, 변두리서 중심으로 | 일직선 위의 비밀 아닌 비밀
나가며
참고문헌
주석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백악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청와대 주소다. 일제강점기이던 1911년 12월 20일 얻은 첫 주소는 ‘광화문 1번지’였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 1일부터는 ‘세종로 1번지’가 됐다. 2014년 1월 1일부터 지금의 도로명이 공식 주소가 됐다. 근대 주소체계를 도입한 뒤 세 번째 얻은 이름이지만 변함없는 ‘1번지’였다.
1번지가 사라질 뻔한 일이 한번 있었다. 2007년 4월 5일 도로명 주소법을 만들 때였다. 종로구는 새 주소를 ‘청와대앞길 50번’으로 정했다. 청와대 측에서 정정신청을 냈다.
본관 내부 모습은 전통양식과 서구양식이 섞여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기둥은 한옥 형식이다. 우물천장에 달려 있는 샹들리에는 꽤나 화려한데 방마다 형태가 다르다. 벽에 붙어 있는 조명등은 왕관이나 용 모양을 하고 있고, 콘센트와 문손잡이는 전통 문양의 금빛 장식을 두르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어색한 동거랄까 절충이랄까, 양쪽을 적당하게 섞어 쓱쓱 비벼낸 느낌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현대 건축물 최악의 사례 중 하나라고 혹평하는 건축가도 있다. 하지만 시대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본관을 지은 90년대는 한국 경제 규모가 본격 궤도에 오르던 시기다. 독재 시대를 마감하며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다. 한 단계 더 도약하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는 단계였다. 열망의 한편에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의구심도 있었다. 본관 건축에는 이런 자긍심과 열등감이 버무려져 있다. 지금은 어정쩡해 보이지만 당대의 한계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청와대 일대에 들어섰던 한옥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없어졌다. 그중에서도 녹지원 일대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의 팔자는 기구하다.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 뒤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허물어 경운궁 증축 자재로 썼다. 휑해진 경복궁 북쪽에 가건물들이 들어서며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다. 조선의 정궁이 일본의 신식 문물 선전장이 된 셈이다. 후원인 경무대의 아름드리나무들은 전쟁물자로 실려 나갔다.
1926년 10월 일제는 경복궁 안에 식민통치 총지휘소인 조선총독부를 완공했다. 그 6개월 전 순종이 세상을 떴을 때 후원 너른 마당에서 상여 운반 연습을 했다. 지금의 녹지원 잔디밭 즈음이다. 가까이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은 1928년에 헐려 용산에 있는 용광사로 갔다. 일본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진언종 사찰인 용광사는 대륙 침략 전쟁 중에 죽은 조선 주둔 일본군 납골당 중 하나였다. 광복 뒤 1946년 원불교가 이를 인수해 서울교당으로 썼다. 2006년 이 자리에 원불교 하이원빌리지(용산구 한강대로40가길 24)가 들어섰다. 보호수가 된 건물 앞 3그루의 늙은 은행나무만이 옛일을 기억한다. 하이원빌리지 바로 뒤가 국방부이고 그 옆에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다시 뜯겨 지금은 전남 영광 원불교 영산성지에 있다. 격변의 세기가 건물 두 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