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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0308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2-05-10
목차
작가의 말
개의 아픔
들쥐
말라깽이
무서운 얼굴
저녁놀
볼펜
골목길
달맞이꽃
나의 카투사 추억
저자소개
책속에서
*개의 아픔
승객들이 모두 내린 다음에도 나는 멍하니 차창 밖에 눈을 둔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안내양이 일깨우는 소릴 듣고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정류장을 빠져나온 나는 한길 가에서 또 잠시 발을 멈췄다. 새로 뚫린 그 길의 끝쪽을 내 눈이 한번 돌아왔다. 아무래도 낯선 고장에 잘못 내린 것만 같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전주, 아크릴 간판, 건물들의 진한 배색. 언제 맥줏집이 다 생겼을까. 나는 한결 마음이 쓸쓸해졌다. 이윽고 나는 가게를 찾았다. 사탕 한 봉지를 사서 옆구리에 끼었다.
읍내에서 마을까지는 두 마장이 되었다. 형네 집엔 해가 떨어진 뒤에야 들어설 것이다. 겨울 날씨가 코끝에 맵다. 몸엔 줄곧 미열이 있었다. 택시가 생겨서 얼마 안 드는 요금으로 편히 갈 수 있다는 얘기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먼저 외투 깃을 세웠다.
마을로 가는 길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이 길은 읍내에서 다른 여러 고장으로 빠지는 길보다는 언제나 한산했다. 같은 지역을 잇는 철도가 나란히 나 있어서 도로는 교통 이용을 나누이기 때문이다. 깜깜한 밤에도 이 길은 흰 대님처럼 뽀얗게 드러난다. 방학 같은 때면 낙향한 읍내 대학생들이 곧잘 이 길을 어울려 걸으며 얘기를 즐긴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이 길에 나와 놀았다. 모래성을 만들기도 했지만 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장꾼들을 보는 재미가 따로 있었다. 맑은 아침 햇빛 속으로 먼 여러 마을에서 장터를 향해 걸어 나오는 그들은 마치 학 떼와 같았다. 언제부턴가 그 흰옷들은 여러 가지 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그들에선 학 떼와 같이 눈부시던 모습도 사라졌다.
나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자신이 동화 속에 나오는 개미네 집을 찾아가는 매미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핵으로 여섯 달 동안의 휴직을 마치고 다시 학교에 나갔을 때, 그새 일했던 사람을 내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교장이 다른 학교를 알선하마고 했으나 나는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다. 그날부터 또 반년을 구직운동을 했으나 허사였다. 가구가 하나하나 팔리고 아내가 사과 장사를 시작했으나 좀처럼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텔레비전이 들려 나갔을 때 문밖에 서서 멍하니 골목길을 내다보던 맏놈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또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마음은 어두워만 갔다.
마을 어귀에서 나는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게시판과 클로버 잎이 새겨진 돌을 양쪽에 세우고 산모퉁이로 돌아 난 길이 병영의 길처럼 군살이 없게 손질이 돼 있다. 산모퉁이 위에 서 있던 정자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나무는 거의 밑둥치에서부터 갈라진 줄기의 가지엔 멧새들이 둥지를 틀었고, 여름이면 노인들과 아이들이 이 나무 밑에서 한낮을 보냈었다.
마을에서 빤히 올려다보이는 이 나무에 까치가 날아와 울면 마을 사람들은 그날 아침 좋은 소식이 생길 걸로 말하곤 했다. 가뭄이 들어 들이 벌겋게 마른 해엔 그 나무 밑에 모여앉아 구름을 살피며 기우제를 의논하기도 했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원추형의 양철 지붕을 얹은 정각이 대신 들어섰다. 기둥과 지붕이 초록색이다. 나는 마을 앞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꼬불꼬불하던 논길이 바르게 잡혔고 경운기가 다닐 만한 길이 나 있다. 냇물가엔 미루나무들이 줄지어 꽂혔다. 나는 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산등성이를 올라서자 마을이 한눈에 든다. 하나같이 슬레이트로 바뀌어진 지붕들이다. 군데군데 층층대를 지닌 골목길들도 말쑥하게 손이 갔다. 대부분의 집은 블록담까지 둘러치고 있었다. 이제도 싸리울과 개나리울타리를 가진 집은 서너 채뿐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개 담을 치지 않고 지냈었다. 그래서 곧잘 이웃집을 아무 때나 드나들었다. 한 집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은 곧 모든 마을 집에 알려졌다. 긴긴 겨울밤이면 이야기를 듣다가 그 집에서 그냥 쓰러져 잠들었다. 새끼를 꼬는 사랑방, 목화를 가리는 안방에서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는 샘물처럼 마르는 법이 없었다.
나는 어느 집에 전등불이 켜진 걸 보곤 형네 집으로 눈을 돌렸다. 단지 한 채 형네 양옥집은 푸른 지붕을 어둠 속에 먼저 묻히고 있었다.
철문 한 짝에 난 출입문은 지쳐만 두었다. 내가 들어서자 현관 옆에서 포인터가 짖어댔다. 문득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형이 사냥을 즐기기 위해 똥개는 복날 없애버리고 포인터를 사들였다는 얘기를 기억했다. 이 마을의 개들은 낯선 사람이 들어서도 짖는 수가 드물었었다. 어디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듯 앞발 위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가 눈을 한번 떠본 뒤 감아 버릴 따름이었다. 그들의 적은 부엉이 울음소리거나 이따금 나타나는 늑대기만 했다. 귓속을 파고드는 포인터의 짖는 소릴 끊으려는 듯 나는 맏조카 애의 이름을 불렀다. 현관 등이 켜지면서 핑크색 스웨터에 남색 치마를 입은 형수가 마루 끝에 나타났다.
“아유, 서방님 오시네요.”
낯익은 사투리. 나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언제부터 형수는 저런 빛깔을 좋아했는가. 이어 형수는 안방 쪽으로 얘들아, 작은아버지 오셨다, 하고 소리쳤다. 조카들 셋이 우르르 몰려나와 내게 꾸벅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이들 역시 빛깔이 진한 옷들을 입었다. 나는 팔을 잡기까지 하는 맏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탕 봉지를 내준 뒤 끝엣녀석을 안고 마루를 올라섰다. 녀석은 밍크오버가 몸에 컸다. 형수는 지금도 아이들 옷을 으레 좀 큰 걸로 사는가 보았다. 자개찬장과 줄기만 심긴 파초 화분 옆에 호두빛 찻상이 놓인 마루. 안방 문 벽 위엔 조화처럼 설게 보이는 솜씨의 과일 정물화 액자가 걸려 있다.
안방의 형광등은 두 알을 끼운 놈이었다. 안방으로 들어선 나는 미간을 찡긋했다. 국화무늬의 벽지에서 부서져 내린 하얀 불빛이 노란 비닐장판에 눈부셨다. 외투를 벗어 형수의 손에 건네고 나는 아랫목에 가서 자리 밑에 손바닥을 깔며 앉았다. 잔뜩 곱은 손에 미지근한 열이 왔다. 나는 온몸이 으스스했다. 그런 나의 머릿속엔 콩댐을 한 명개장판이 떠올랐다. 형수는 아이들만 데리고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형님은 어딜 가셨어요?”
아랫목 포대기 밑에 주발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은 뒤 뚜껑을 여는 형수가 웃음기를 띄우긴 했지만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허구헌날 읍낼 나가지 않으면 사냥질이나 가지 뭐유.”
나는 엽총을 들고 뛰어다니는 형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신발에 새끼를 감고 토끼를 쫓던 그가 아닌 것이다. 그는 총의 위력과 명중률에 깊은 흥미를 가질 것이다.
“갠 집에 있던데요?”
“병신 됐다구 싫대유, 글쎄.”
“병신이라뇨?”
형수는 별하게 긴 인중을 한번 씰룩하더니 키득 웃었다.
“누가 아유, 배 밑이 좀 달라진 걸 벼엉신 병신 해유, 글쎄. 늙으면 그렇기두 하다는데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더 묻기도 싫었다.
“오늘도 사이렝이나 불어야 들어올지 말지 한걸유, 뭐.”
밥그릇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자 나는 시장기를 깨달았다. 마루로 나갔던 형수가 맥주 한 병을 컵과 함께 들고 들어왔다. 술엔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형수를 말리지 않았다. 밥상엔 으레 막걸리 한 사발이 따라야 하는 걸로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형수는 병마개를 몇 번 튀기기만 하다가 겨우 땄다. 조심스럽게 맥주를 따랐지만 컵 속엔 반도 차지 않으면서 부그르 거품이 넘쳐나왔다. 나는 밥을 씹던 입을 얼른 컵으로 가져갔다.
“암만해두 맥준 못 따르겠어유.”
그녀의 얼굴빛이 잠깐 발갛게 물들었다.
“대수로울 게 있나요.”
“형님은 번번이 타박인걸유.”
“형수는 끝엣놈 돌잔치 때 얘기를 꺼냈다. 생전 보지도 못한 형의 읍내 친구들이 여남은명 반상기를 사 들고 몰려왔다. 술들이 취하자 그들은 형에게 마누라를 데려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안방에 끌려간 그녀는 맥주 따르기를 실패했고, 시킨 노래만은 도망쳐서 가까스로 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