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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 ISBN : 9791169095501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6-04-30
책 소개
나, 디디에 에리봉, 에두아르 루이
우정이라는 삶의 양식은 하나의 윤리를 요청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삶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연속된 일기와 같다.
우정은 삶의 원리이자, 공간과 시간, 제도, 타자와 맺는 관계를 새로이 조직했다.
다만 이 결속이 우리 삶의 일부를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 부정확한 이유는
이것이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정의 자리는 어디에, 언제까지, 얼마만큼 주어질까. 이 책의 저자인 조프루아 드 라갸느리, 그의 연인이자 친구인 디디에 에리봉(『랭스로 되돌아가다』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저자), 또 다른 친구 에두아르 루이(『에디의 끝』 저자). 세 사람은 이 질문에 아마 영원을 답할 것이다. 우정은 영원토록, 심지어 삶의 일부도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도래할 수 있다.
라갸느리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삶의 여러 층위를 제약하는 권력 체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왔다. 푸코, 부르디외, 들뢰즈, 데리다의 궤적을 따랐으며, 체계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혹은 그 바깥에서 비정형적인 삶의 경로를 탐색했다. 그의 주된 질문은 이렇다. ‘우리는 무엇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될 수 있던 수많은 가능태와 실제로 된 것 사이의 간극은 무엇인가.’ 그의 저술 작업은 이 질문들에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다만 이 책의 각별한 점이라면 여기서 꺼내 보일 이야기가 그의 전기 속에 실제로 체험되고 각인된 관계를 다룬다는 점이다. 세 사람의 우정은 2011년 9월을 기점으로, 개별적 삶과 사회적 관계의 위상을 뒤집으며 시작됐다. 우정이라는 삶의 틀이 전면적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셋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던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지는 못한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게, 라갸느리가 지적하듯 연인의 사랑이 시작된 날은 두고두고 기념되는 것과 달리 우정에는 기입된 날짜가 없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외삼촌의 아들과 아버지의 사촌형의 아들을 구분해 부르는 말은 있어도, 한 달에 한 번 밥이나 먹는 사람과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구별해 부르는 말은 없다. 친구 간의 어울림은 시절인연으로, 즉 정상성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절차쯤으로 축소되고,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는 삶이 보편이 된다. 세계는 가족중심주의를 강력히 작동시킨다. 가령 팬데믹으로 도시가 봉쇄돼도 멀리 사는 가족을 만나고자 세계를 횡단하는 일은 아름답고 모범적인 가족애로 그려진다면, 길 건너 사는 친구의 안부를 묻기 위한 이동은 체제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차단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전락한다. 이럴 때 ‘친구’라는 말은 턱없이 부실하고 빈곤한 단어에 그친다. 라갸느리, 디디에, 에두아르는 규칙을 거부하거나, 구실을 꾸며내거나, 늦은 밤에야 집을 나서거나, 여러 장의 이동 확인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밖에 없다. 이들 세 사람이 퀴어 당사자로서 경험했던 ‘자리 없음’은 우정 관계에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2의 세계’ 바깥에 정초한 관계는 기념일을 세우지 못하고, 세분된 언어로 불리지 못하며, 계속해서 불안정한 지위에 좌초된다. 라갸느리의 글은 여기서 시작한다. “본질적으로 통치자들의 사유 속에 각인된 가족주의에 대한 반란”이자, “가족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해온 사회 전체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엇이 우리 삶을 이렇게 배치하며, 어떤 열망과 정동이 공적 공간을 떠도는 이미지들에 의해 지지받거나 외면될까. 이 책은 라갸느리가 자기 삶의 전기로 쓴 일종의 매뉴얼이자 우정을 해부하는 사회학서이고 철학서다. 세 사람의 우정이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천은 우리가 친구 사이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전부 넘어선다. 이들의 우정은 매일 거듭나고, 삶을 전면적으로 탈바꿈하며, 서로의 창조성을 자극한다. 우정 예찬이라 부제를 달았지만, 우정의 ‘반란’이라 일컬어져야 할 것이 이들 삶에 꿈틀댄다.
끊김과 공백 없는 가용성의 윤리
밀실의 문법을 벗어던지며 시작되는 ‘3의 세계’
“나는 내 거실보다 카페가 더 내 집처럼 느껴진다.”
종종 우정은 공들여 발명하고 수선해야 할 여느 관계와는 다르게 취급된다. 특히 ‘2의 세계’가 빚어낸 생활 리듬은 우정의 세계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라갸느리는 ‘사회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을 획일화하는 거대한 장치’라던 롤랑 바르트의 말을 원용한다. 그가 예시한 사례만 봐도 그렇다. 디디에가 참석한 학술대회의 공식 일정은 평일 오전 시간대에 잡혔는데, 자녀를 둔 이들의 생활 리듬을 배려한 것이었다. 오전 일정에 참석하지 못한 디디에는 그저 불성실한 사람이 된다. 주된 리듬에 올라타지 못한 엇박자는 손쉽게 비정상으로 낙인찍힌다. 주류 공간 바깥에서 만들어진 관계들은 리듬을 변주하며 틈입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3의 세계’란 필연적으로 발명을 거듭해 그만의 패턴을 만들고, 삶 전체를 탈주와 변속으로써 재배열해야 한다.
이렇게 창조된 고유한 리듬은 가용성과 개방성의 기술로 지켜진다. 세 사람은 언제나 서로에게 삶의 일부, 특히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에서 “가용성의 윤리”를 실천한다. 그들은 서로가 있을 때, 심지어 없을 때면 더더욱이 서로의 존재를 가정한다. 한 사람이 어떤 경험을 혼자 겪고 있다 해도 그 순간 다른 두 사람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함께다. 한 시간에 열 통이 넘는 메시지가 오가고,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함께 보내며, 한 사람이 출장을 가기라도 하면 다른 두 사람이 일정을 조율해 따라나선다. 이들의 친밀성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가용성’은 기술이자 인프라로서 관계를 뒷받침해준다.
여행을 가서도 그들만의 리듬은 지속되는데, 이때 카페가 거점이 되어준다. 발렌시아에서는 르 마르키마르키Le Marquis, 볼로냐에서는 자나리니Zanarini, 아테네에서는 다 카포Da Capo. 세 사람이 카페를 찾는 건, 이곳이 애초에 개방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라갸느리는 조지 촌시의 『게이 뉴욕Gay New York』의 일화 중 1930~1940년대 게이들이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욕망을 실현할 수 없기에 공공장소로 나섰던 것을 떠올리며, 우정의 방식도 이렇다고 말한다. 우정은 가정이라는 닫힌 세계에서는 펼쳐질 수 없다. ‘2’의 배타성은 우리가 다른 관계로 확장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따라서 이들은 바깥을 향해 “심리적 방향”을 전환하고, 서로를 예속하던 ‘2의 세계’와 절연함으로써 삶을 사적 영역으로부터 탈중심화한다. 이렇게 우정은 “해방적인 바깥을 생산한다”.
우정의 이해관계
열린 우정과 더 넓은 복수의 우정
“명시적 내용을 유예한 채 성립되는 관계는,
실상 사회적 세계가 이미 형성하고 유지해온 유대들은 되풀이하는 데 그친다.
그 관계는 필연성을 산출하지 못한다.”
라갸느리, 디디에, 에두아르가 모두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해방으로써 촉발된 바깥은 좀더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다. 이들은 대학이라는 장 대신 우정이 지지하는 상호부조와 격려의 장에 진입하며, 그곳에서 인정 기준을 재편하고 그들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이때 먼저 학술 장에 자리 잡은 디디에는 라갸느리와 에두아르에게 일종의 “대항 권력으로 기능”했다. 그는 다소 어려운 요구를 하는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같은 책을 써라”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목표로 삼지 마라”는 것이다. 모순돼 보이는 두 원칙은 함께 작동하며 두 사람을 “가장 높은 야심”으로 이끌고, “학문 장과 문화 장이 행사하는 검열”과 “위대한 모델이 불러일으키는 위압과 자기 검열”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들의 해방된 우정 공동체는 개인적인 친교를 넘어 비제도적인 문화 장치로서 기능하며 그곳에서 이들은 서로를 부조한다.
이들 우정을 보다 보면 짐작할 수 있지만, 라갸느리는 키케로가 정의하는 “이익을 기대하며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랑처럼 “그 자체로 목적”을 이뤄야 한다는 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관계의 도구적 성격 혹은 이해관계는 배제되어 마땅하게 여겨지고, 더 윤리적인 관계는 따로 있다고 상상되지만, 라갸느리는 우정을 실질적인 필요와 역량 증대에 연결한다. 서로의 구체적인 필요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이어지는 그럴듯한 관계는 널려 있다. 관계의 내용이 관계 밖에 있는 한, 관계를 존속하려는 이유는 상실될 터다. 따라서 이해관계에 적을 둔 우정만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생적일 수 있다. 또한 이는 동시에 중요한 자질을 요구하는데, 우정을 관계적 실천이자 자기 규정의 방식으로 지켜나가려면 삶의 어떤 시기에는 중요했으나 이제 더 이상 나를 뒤흔들어놓지 못하는 관계를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다만 거기서 닫히지 않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관계로 채워가는 일 또한 함께 요청된다.
우정은 우리 삶에 돌연 출현하고, 기존의 질서와 규정을 가로막으며 뜻밖의 공간을 열어주다가도, 우리가 이를 지켜낼 만큼 몰입하지 않았을 때 가차 없이 끊긴다. 우리가 부단히 우정을 발견하고 구축한다면, 세상이 부여한 기준이나 모종의 판단, 도덕, 타인의 인정도 아닌 우리만의 고유한 조건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정을 뜯어 살피며 예찬하는 일은 삶을 자유롭게 한다. 또한 우리는 기대해야 한다. ‘3의 세계’는 보편을 해체하고 바깥을 열망하기에, 그 안에는 더 다채로운 ‘복수의 세계’로의 가능성이 이미 자리한다.
목차
서문
1장 ( 셋의 삶 )
2장 ( 우정적 주체 )
3장 ( 다르게 살기 )
4장 ( 써나가야 할 삶 )
5장 ( 인정 너머의 삶 )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아마도 우리는 끝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온전히 선택하지 못할 터다. 우리의 전기는 대개 시간과 공간의 질서 속에 미리 마련된 자리들을 차례로 점유해가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여러 틀이 우리에게 부과되고, 여러 역할이 우리의 몸과 정신을 사로잡으며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앞으로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결정하는 만남들이 우리 운명을 빚어낸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피할 수 없는 필연들에 복속되어 있다는 이러한 체념이, 우리를 무력감으로 이끄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그 필연은 흔히 나이와 출산과 같은 자연적·생물학적 욕망들 혹은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사회적 힘들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양식들을 의식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따라서 그러한 성찰의 필연성을 긍정해야 한다.
나는 삶의 형식들에 관한 하나의 물음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우리가 실제로 되어가는 것과 우리가 발전시킬 수도 있었던 자기 자신의 수많은 가능태 사이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번에도 나는 하나의 특이한 사례를 포착하고 그 사례를 서술하는 방식에 의지할 것이다. 다만 이 특이성은 추상적 대상이 아니라, 나의 전기 속에 깊이 각인되어 실제로 체험되어온 관계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디디에 에리봉과 에두아르 루이, 그리고 나. 우리를 이어주고 관통해온 우정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