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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72740566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5-07-21
책 소개
“15년 전 야간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를 찾습니다”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나 또 있던, 우리 안의 오랜 동무 이야기
“조용한 아이는 눈에 띄지 않고, 말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들키지 않는다. 양선미의 소설이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파고드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소설가 김별아의 평에 걸맞게, 양선미의 소설 『영이의 고독』은 우리라는 영역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신을 가리고 있던, 어떤 존재에 대해 다룬다.
그이, 또는 그것은 이재에 밝지도 욕망에 솔직하지도 못하다. 불의 앞에서 과감하거나 어떻게든 끈기 있게 버텨내는 유형과도 거리가 멀다. 이 가냘픈 생명으로 만든 이야기는 심장을 두들기는 투쟁기도, 배우와 관객을 모두 쓰러뜨리는 비극도, 주인공이 드문 성공을 움켜쥐는 영웅서사도 될 수 없다. 단지 사람들 누구에게나 드리워 있는 아픔과 고독을, 현대사회의 상흔을 품은 어느 가슴을 그려낼 뿐이다. 단지 그것으로써 “선량한 사람의 고독한 생(生)은, 과장 없이 소설이 된다”(소설가 오현종).
이 소설의 영이처럼 자신의 속내를 꺼내지 않고 자신을 어필하지 않는 타인에게서, 역시 평범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영이의 고독』은 우리가 늘 망각하는 사실을 세밀히 짚어나간다. 영이와 같은 이들이 우리 사회의 필수적인, 그래서 당연히 핵심적인 위치에서 우리를 늘 보살펴 왔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타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아주 내밀한 구석의 무엇과도 꼭 닮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곁을 스쳐간 수많은 ‘영이들’을 떠올린다”(소설가 하성란).
서정적이고 절제된 문체, 세심한 심리묘사와
그리울 것 없으면서 왠지 그립게 만드는 레트로 체크무늬로 완성된 소설
평범함이 일종의 미덕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우악스럽고, 잔혹하고, 추근거리고, 술을 진탕 마셨건 아니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평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 직접 다시 돌아가라면 그래서 당연히 사절이지만, 그 시대를 겪어 보지도 못한 젊은이들조차 왠지 모르게 그리워진다는 그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삶’을 이어온 어느 한 여성의 이야기, 『영이의 고독』이다.
『영이의 고독』은 영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 여성의 생애사를 다룬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이는 겁쟁이였다.” 그는 키는 크지만, 화약총이 무서워 달리기에서 늘 꼴찌를 기록하는 심약한 중학교 1학년이다. 20세기의 학교는 폭력적이다. 특히 체육부는 폭력적이다. 장신이라는 이유로 사격부로 차출된 겁 많은 영이는 가혹한 환경에 노출된다. 상급생은 선생을 흉내내 하급생에게 구타를 일삼는다. 타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던 영이는 어쩌지도 못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운동부 생활을 계속한다. 그렇게 3년이 지나, 폭력과 사격에 간신히 적응할 무렵, 그는 사격부를 자기도 모르게 그만두어 버린다. 그리고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뉜 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라는, 막연한 처지에 놓인 자신을 발견한다.
소설이 그리는 영이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영이는 거의 언제나 소극적이고, 세상의 도전을 제대로 헤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자기 어필을 잘하거나 사교적으로 뛰어난 인물도 아니다. 아니, 그 정반대다. 당연히 사회적 성공과는 동떨어진 위치에서 맴돈다. 지혜롭다고 보기도 애매하고 무슨 영성적 마력이 있는 유형도 아니다. 착하다는 게 장점으로 제시되긴 하지만, 소설이 암시하는 그것의 결정적 계기는 『캔디캔디』 같은 어린 시절의 책들이 제안하는 관념, 즉 ‘착하게 살면 기적이 올 거야’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일종의 동화적 세계관이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따라서 진지한 소설의 세계 역시 동화적일 수 없다. 영이의 소망은 늘 깨지고 엇나간다. 그렇게 그는 상처를 안고 안은 채 점점 고독해져만 간다.
언뜻 세상과 제대로 대결하지 못하는, 늘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애매한 패배로만 사건을 마무리짓는,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어느 면에서나 결격으로만 보이는 이 영이를 작가는 왜 선택했을까. ‘저자의 말’에 나오듯, 단지 자기의 어린 시절 모습과 닮아서일까.
『영이의 고독』은 주인공 영이가 세상과 자기 나름으로 조화하고 불화하는 이야기다. 영이가 마주하는, 학교와 가정에서, 대학과 직장에서 비슷하게 변주되는 폭력들은 일종의 병영국가였던 한국의 개성을 잘 드러낸다. 체육 교사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군대에서 배워 온 조직통제 기법을 작은 병영인 사격장에 그대로 실행한다. 학생들은 교사가 가르치는 폭력을 사격만큼이나 열심히 학습한다. 영이가 사격부를 그만두는 광경은 소설에서 언뜻 충동적으로만 그려지지만, 그것은 영이 자신이 사격부라는 가학-기구에 마침내 적절히 적응했다고 자각하는 시점이다. 좋은 기록을 거두고 나서야 영이는 비로소 자신이 마주한 폭력을 공포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사회화, 폭력의 체화, 영이의 미래, 대학, 사회적 성공은 분간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직진할 것인가, 아니면 물러서서 그것들을 부정할 것인가의 윤리적 기로에서 영이는 후자를 택한다.
역시 영이의 다른 충동으로 그려지는 남자와의 이별 장면에서도 비슷한 기제가 읽힌다. 영이의 첫 경험 – 키스, 포옹, 그리고 어쩌면 섹스 – 는 성폭력의 역겨운 맛으로 기억된다. 영이는 폭력 이후에도 폭력을 경험한 장소인 대학에 급사로 계속 출근해야 했고, 자신이 비난받을 것이 뻔했기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토로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사귄 남자와의 모텔행 직전, 돌발적인 만남과 우연한 대화들이 앞서의 사건을 강력히 상기시킨다. 그래서 영이는 좋은 남자의 아내라는 행운을, 역시 자신의 판단 근거를 명확히 포착하지 못한 상태로 거부하고 만다.
영이는 기적을 바라지만, 기적으로 포장된 것 안에 면면히 흐르는 현실을 지각하는 인물이며, 가학적 체제를 은폐하려는 행운의 ‘이물감’을 누구보다도 잘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다. 즉 ‘기적은 더 이상 착하지 않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선택한 불행 속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소화불량에 시달리거나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간다.
급사라고 불리는 보조 사무원, 경리, 요양보호사,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거나 현재 그러고 있는 직군들이다. 사회적 성공을 부여받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사회는 존재의 동력을 상실한다. 물론 세상에는 그 노고의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직업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버스 안내양 같은 어떤 직업들은 가끔씩 추억의 ‘대상’으로나 소환될 뿐, <전국노래자랑>의 오프닝 멘트에 등장할 자격을 얻지도, <국제시장>의 주연으로도 등장하지 못한다. 영이는 이렇게 타자화된 많은 ‘영이’들의 분신으로서, 그들의 일상과 묵묵히 함께하며, 그들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공유한다.
그런 직업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종사하는 특징을 지녔기에, 『영이의 고독』은 여성서사로서도 그 담론적 의미가 충분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영이의 개성은 여성성의 전형으로 읽히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사회의 평가야 어떻든 그런 개성의 의미는 낮추어 볼 수 없다. 세상이 특별함을 요구하면 할수록 누군가는 조용히 묵묵해야 하고, 세상이 금전적 성공을 노래할 때 누군가는 돈이 안 되는 영역에서 여전히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80, 90년대의 억척스러움과 소란스러움을 추억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 많은 영이를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는 그들 덕분에 그 레트로의 세상도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니까. 『영이의 고독』은 그런 영이들을 호명하며, 삶에서 역시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기 쉬운 우리 안의 그런 개성들을 또한 주목하고 있다.
목차
작가의 말 007
1부
사격부원의 시간 011
2부
급사의 시간 073
3부
경리의 시간 129
4부
요양사의 시간 209
저자소개
책속에서
마지막 문장을 완성한 뒤 ‘끝.’이라고 쓰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런저런 핑계로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끝낸 기분이 든 탓이었다. 좀처럼 자라지 못한 채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있던 소심하고 겁 많은 소녀를 비로소 떠나보낸 듯했다.
_ 작가의 말
영이는 온순했다. 영이에게는 누군가의 부탁이나 명령을 거슬러본 기억이 없었다. 순한 기질로 태어난 것인지, 세상의 사물을 분간하고, 배고픔을 알게 되고, 자신의 출생에 개입한 것이 사랑이나 믿음이 아닌 어리석음과 경솔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1부_ 사격부원의 시간
영이가 분노의 원인을 알게 된 건 그날따라 혹독했던 훈련, 가혹했던 비난, 히스테리에 가까운 신경질을 온몸에 뒤집어쓴 뒤 교문을 나섰을 때였다.
암튼 종미 언닌 왜 그렇게 영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영이야 오늘 정말 힘들었지.
맞아. 아무리 사수라도 너무한 거 아냐. 오늘은 완전 미친 것 같더라. 어휴 키도 작은 게 꼴에 선배라고.
오늘은 영이가 아무리 잘했어도 괴롭혔을 거야.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 끝에 한 아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나머지 둘이 동시에 물었다.
아는 언니한테 들은 건데. 너네, 국어 선생님이 3학년 한문도 가르치는 거 알지.
자기에 대한 집중이 흐뭇한 듯 아이의 눈이 빛났다.
1부_ 사격부원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