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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중국소설
· ISBN : 9791173070198
· 쪽수 : 395쪽
· 출판일 : 2024-11-28
책 소개
목차
전선(銓選)
31-1(0787) 사장(謝莊)
31-2(0788) 고계보(高季輔)
31-3(0789) 적인걸과 장열(狄仁傑·張說)
31-4(0790) 이지원(李至遠)
31-5(0791) 노종원(盧從願)
31-6(0792) 정고(鄭杲)
31-7(0793) 석포충(石抱忠)
31-8(0794) 당교(唐皎)
31-9(0795) 사봉관(斜封官)
31-10(0796) 이름을 풀로 붙여 가리다(糊名)
31-11(0797) 정음과 최식(鄭愔·崔湜)
31-12(0798) 양국충(楊國忠)
31-13(0799) 이임보(李林甫)
31-14(0800) 배광정(裴光庭)
31-15(0801) 등갈(鄧渴)
31-16(0802) 이적지(李適之)
직관(職官)
31-17(0803) 재상에 대한 고찰(宰相考)
31-18(0804) 소괴(蘇瓌)
31-19(0805) 참작원(參酌院)
31-20(0806) 여온(呂溫)
31-21(0807) 이정(李程)
31-22(0808) 잡설(雜說)
31-23(0809) 오원(五院)
31-24(0810) 어사에 대한 고찰(御史考)
31-25(0811) 어사본초(御史本草)
31-26(0812) 어사에 대한 희학(御史謔)
31-27(0813) 평사가 어사대로 들어가다(評事入臺)
31-28(0814) 한고(韓皋)
31-29(0815) 상서성(尙書省)
31-30(0816) 최일지(崔日知)
31-31(0817) 상서성의 다리(省橋)
31-32(0818) 비서성(秘書省)
31-33(0819) 사청(莎廳)
권32 장수부(將帥部) 효용부(驍勇部)
장수(將帥)
32-1(0820) 이광필(李光弼)
32-2(0821) 마훈과 엄진(馬勛·嚴振)
32-3(0822) 온조(溫造)
32-4(0823) 고병(高騈)
32-5(0824) 장준(張濬)
32-6(0825) 장경(張勍)
효용(驍勇)
32-7(0826) 치구흔(甾丘訢)
32-8(0827) 임성왕(任城王)
32-9(0828) 환석건(桓石虔)
32-10(0829) 양대안(楊大眼)
32-11(0830) 맥철장(麥鐵杖)
32-12(0831) 팽낙(彭樂)
32-13(0832) 고개도와 두복위(高開道·杜伏威)
32-14(0833) 울지경덕 등(尉遲敬德等)
32-15(0834) 시소의 동생(柴紹弟)
32-16(0835) 가서한(哥舒翰)
32-17(0836) 신승사(辛承嗣)
32-18(0837) 이한지(李罕之)
32-19(0838) 송영문(宋令文)
32-20(0839) 팽박통(彭博通)
32-21(0840) 노신통(路神通)
32-22(0841) 왕절과 왕배우(汪節·王俳優)
32-23(0842) 묵군화(墨君和)
권33 편급부(褊急部) 혹포부(酷暴部)
편급(褊急)
33-1(0843) 시묘(時苗)
33-2(0844) 왕사(王思)
33-3(0845) 이응도(李凝道)
33-4(0846) 황보식(皇甫湜)
33-5(0847) 이반(李潘)
33-6(0848) 왕공(王珙)
혹포(酷暴)
33-7(0849) 마추(麻秋)
33-8(0850) 주찬 등(朱粲等)
33-9(0851) 이희열(李希烈)
33-10(0852) 독고장(獨孤莊)
33-11(0853) 무승사(武承嗣)
33-12(0854) 학상현(郝象賢)
33-13(0855) 주흥(周興)
33-14(0856) 내준신(來俊臣)
33-15(0857) 왕홍의(王弘義)
33-16(0858) 색원례(索元禮)
33-17(0859) 삼표(三豹)
33-18(0860) 사우(謝祐)
33-19(0861) 성왕 이천리(成王千里)
33-20(0862) 양양의 표본 절도사(襄樣節度)
33-21(0863) 사모(史牟)
33-22(0864) 안도진(安道進)
권34 권행부(權幸部) 첨녕부(諂佞部)
권행(權幸)
34-1(0865) 장역지 형제(張易之兄弟)
34-2(0866) 괵국부인(?國夫人)
34-3(0867) 왕준(王準)
34-4(0868) 이임보(李林甫)
34-5(0869) 어조은(魚朝恩)
34-6(0870) 원재(元載)
34-7(0871) 노암(路岩)
34-8(0872) 팔사마와 십사호(八司馬·十司戶)
첨녕(諂?)
34-9(0873) 조원해(趙元楷)
34-10(0874) 이교(李嶠)
34-11(0875) 주흥과 부유예(周興·傅游藝)
34-12(0876) 곽패(郭?)
34-13(0877) 고원례(高元禮)
34-14(0878) 종초객과 장급(宗楚客·張?)
34-15(0879) 최융 등(崔融等)
34-16(0880) 길욱(吉頊)
34-17(0881) 장열(張說)
34-18(0882) 정백헌(程伯獻)
34-19(0883) 이임보(李林甫)
34-20(0884) 이장(李璋)
34-21(0885) 풍도명(馮道明)
34-22(0886) 장준(張浚)
34-23(0887) 이덕유(李德裕)
34-24(0888) 왕승휴(王承休)
권35 사치부(奢侈部) 탐부(貪部) 인부(吝部)
사치(奢侈)
35-1(0889) 운명대와 시황묘(雲明臺·始皇墓)
35-2(0890) 한 성제(漢成帝)
35-3(0891) 한 영제(漢靈帝)
35-4(0892) 제야(除夜)
35-5(0893) 당 예종(唐睿宗)
35-6(0894) 현종(玄宗)
35-7(0895) 하간왕 원침(河間王琛)
35-8(0896) 안락 공주(安樂公主)
35-9(0897) 동창 공주(同昌公主)
35-10(0898) 곽황(郭?)
35-11(0899) 곽광의 처(?光妻)
35-12(0900) 한언(韓?)
35-13(0901) 허경종(許敬宗)
35-14(0902) 아장(阿臧)
35-15(0903) 위척(韋陟)
35-16(0904) 원재(元載)
35-17(0905) 양수(楊收)
35-18(0906) 우적과 이창기(于?·李昌夔)
35-19(0907) 왕애(王涯)
35-20(0908) 이덕유(李德裕)
35-21(0909) 이 사군(李使君)
35-22(0910) 원광한(袁廣漢)
탐(貪)
35-23(0911) 배길의 고모부(裴佶姑夫)
35-24(0912) 엄승기(嚴升期)
35-25(0913) 하후표지(夏侯彪之)
35-26(0914) 왕지음(王志?)
35-27(0915) 장연상(張延賞)
35-28(0916) 왕웅(王熊)
35-29(0917) 정인개(鄭仁凱)
35-30(0918) 위공간(韋公幹)
35-31(0919) 용창예(龍昌裔)
35-32(0920) 안중패(安重?)
35-33(0921) 장건쇠(張虔釗)
35-34(0922) 영남의 군목(嶺南郡牧)
치생(治生) 부(附)
35-35(0923) 배명례(裴明禮)
35-36(0924) 두예(杜乂)
인(吝)
35-37(0925) 심준(沈峻)
35-38(0926) 이숭(李崇)
35-39(0927) 하후처신 등(夏侯處信等)
35-40(0928) 유숭귀(劉崇龜)
35-41(0929) 왕악(王鍔)
35-42(0930) 배거(裴璩)
35-43(0931) 귀등(歸登)
책속에서
31-4(0790) 이지원(李至遠)
[당나라] 여의(如意) 원년(692)에 천관낭중(天官郞中 : 이부낭중) 이지원은 임시로 시랑(侍郞)의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 관리 선발 대기자 중에 성이 조(?)인 사람과 왕원충(王元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임용에서 탈락되었다. 그러자 이들은 은밀히 영사(令史)와 짜고 성의 점과 획을 지워서 조(?)를 정(丁)으로 고치고 왕(王)을 사(士)로 고쳤다가, 관직을 받은 후에 점획을 더해서 원래대로 만들려고 했다. 이지원은 명단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리고 말했다.
“올해 만 명을 전형하면서 그들의 성명을 모두 알고 있는데, 어디에 정씨와 사씨가 있었던가? 이것은 조 아무개와 왕 아무개다.”
상서성(尙書省)에서는 그를 귀신처럼 총명하다고 여겼다.
33-4(0846) 황보식(皇甫湜)
[당나라의] 배도(裴度)가 낙양(洛陽)을 편안하게 다스리고 있을 때 황보식을 종사(從事)로 초징했다. 황보식은 거침없이 객기를 부렸지만 배도는 매번 그를 너그럽게 포용했다. 배도는 불교를 믿었는데 자신이 회서(淮西) 지방을 토벌할 때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재앙이 미칠까 염려해서, 아주 장엄하고 화려하게 복선사(福先寺)를 중수했다. 불사가 완공되는 날이 다가오자 배도는 백거이(白居易)에게 편지를 보내 비문을 써 달라고 청하려 했다. 황보식이 그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가까이 있는 저를 놔두고 멀리 있는 백거이를 부르신 것은 제가 뭔가 잘못을 한 게 분명하니, 작별 인사를 드리고 물러가길 청합니다.”
빈객 중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배도가 부드러운 말로 사과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감히 번거롭게 부탁하지 못했던 것은 대문호에게 거절당할까 봐 걱정해서였는데, 지금 이미 그러하다면 그건 내가 원하던 바요.” 미 : 배도는 정말로 도량이 크다.
황보식은 화가 조금 누그러지자 술 한 말을 달라고 해서 돌아가더니, 집에 도착해서 혼자 그 절반을 마신 다음 술기운을 빌려 붓을 휘둘렸는데, 금세 문장이 완성되었다. 다음 날 황보식은 다시 깨끗이 써서 배도에게 바쳤다. 그 문장은 뜻이 매우 예스럽고 글자 또한 괴벽했다. 배도는 한참 동안 궁리해 보았지만 그 구두를 나눌 수 없자 감탄하며 말했다.
“[옛날 진(晉)나라의] 목현허[木玄虛 : 목화(木華)]나 곽경순[郭景純 : 곽박(郭璞)]의 무리로다!”
그러고는 값비싼 수레와 명마에 비단과 노리개 등 1000여 민(緡 : 1민은 1000냥)의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편지와 함께 그의 집으로 하급 장교를 보내 사례했다. 그러나 황보식은 편지를 보고 크게 화를 내더니 땅에 편지를 던지면서 하급 장교에게 말했다.
“시중(侍中 : 배도)께 말씀 전해 주게. 어찌 이렇게 야박하게 대우할 수 있는가? 내 글은 일반 무리의 글이 아니네. 나는 일찍이 고황(顧?)의 문집에 서문을 지어 준 것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글을 써 준 적이 없네. 이번에 그 비문을 쓰겠다고 청한 것은 그간 받은 은혜가 매우 두터웠기 때문이네. 하지만 비문의 글자가 약 3000자인데, 한 자당 비단 세 필씩이며 여기서 한 푼도 깎을 수 없네.”
하급 장교가 걱정하고 화를 내면서 돌아가서 황보식의 말을 자세히 고했더니, 막료들이 모두 분해하면서 그의 살점을 저며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도는 웃으며 말했다.
“진정 기재(奇才)로다!”
그러고는 즉시 황보식이 원하는 액수대로 다시 사례했다. 유수부(留守府 : 배도의 관부)에서부터 정랑(正郞 : 황보식)의 집까지 사례품을 실은 수레가 이어졌는데, 낙양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니 마치 옹수(雍水)와 강수(絳水)에서 배 띄우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황보식은 사례품을 받으면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황보식의 편협하고 급한 성질은 정말 유별났다. 그가 한번은 벌에 손가락을 쐬었는데, 몹시 조급하게 화를 내며 좋은 값으로 널리 벌집을 사들인 후에 그것을 짓이겨 진액을 짜내게 함으로써 자기의 아픔을 갚았다. 또 한번은 아들 황보송(皇甫松)에게 시 몇 수를 베껴 적게 했는데, 한 글자를 조금 틀리자 펄펄 뛰며 욕을 퍼부으면서 손에 막대기가 잡히지 않자 피가 흐르도록 아들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35-6(0894) 현종(玄宗)
[당나라] 현종은 화청궁(華淸宮)에 행차해 온천탕 하나를 새로 넓혀 웅장하고 화려하게 축조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안녹산(安祿山)은 범양(范陽)에서 백옥석(白玉石)으로 물고기·용·오리·기러기를 만들고 또 돌다리와 돌연꽃을 만들어 바쳤는데, 그 조각한 솜씨가 너무 정교해서 거의 사람이 만든 게 아닌 듯했다.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 기물들을 온천탕 안에 진열하라고 명했으며, 또한 돌다리를 온천탕 위에 걸쳐 놓고 돌연꽃을 물가에서 갓 피어나는 것처럼 배치하라고 했다. 현종은 화청궁에 행차해 그곳에 이르러 옷을 벗고 들어가려 했는데, 물고기·용·오리·기러기 조각이 모두 비늘을 떨치고 날개를 펼치면서 마치 살아서 날아 움직일 듯했기에, 현종은 몹시 두려워서 급히 그것들을 치우라고 명했다. 그래서 돌연꽃과 돌다리만 남아 있다. 현종이 또 한번은 화청궁에 수십 칸이나 되는 장탕옥(長湯屋)을 만들어 그 둘레를 무늬 돌로 꾸몄으며, 은을 상감해 옻칠한 배와 백향목(白香木)으로 만든 배를 그 안에 띄웠는데, 노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옥으로 장식했다. 또 온천탕 안에는 벽옥(碧玉)과 침향(?香)을 쌓아 산을 만들어 영주산(瀛洲山)과 방장산(方丈山)처럼 꾸며 놓았다. 현종이 화청궁에 행차하려 하자, 양귀비(楊貴妃) 자매는 다투어 거복(車服)을 장식해 독거(犢車) 한 대를 황금과 비취로 장식하고 주옥을 섞어 넣었는데, 수레 한 대를 치장하는 데 들어간 비용이 수십만 관(貫 : 1관은 1000냥)을 훨씬 넘었다. 그러나 치장한 수레가 너무 무거워서 소가 끌 수 없었다. 그래서 양귀비 자매는 다시 현종에게 아뢰어 각자 말을 타고 가겠다고 청한 뒤, 다투어 명마를 사서 황금으로 재갈을 만들고 수놓은 비단으로 장니(障泥)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함께 양국충(楊國忠)의 저택에 모였다가 같이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그 성대한 행차가 번쩍번쩍 빛났으며 구경꾼들이 담을 두른 것처럼 많았다. 양국충의 저택에서 도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마부와 거마(車馬)들로 그 사이가 시끌벅적했다. 양국충은 손님과 함께 집에 앉아 있다가 그 행차를 가리키며 손님에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한미(寒微)한 출신이지만, 초방(椒房 : 황후의 거처로 양귀비를 말함)의 친척이 되었기에 이러한 정도에까지 이르렀소. 나는 지금도 내가 쉬게 될 자리를 알지 못하고 결국 훌륭한 명성을 이룰 수 없을까 걱정하지만, 그래도 모름지기 부귀함에서 즐거움을 취할 따름이오.”
이로 말미암아 양씨 집안은 교만하고 사치를 부리는 작태가 날로 더했으며 그러면서도 늘 부족한 것처럼 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태평 공주(太平公主)의 옥엽관(玉葉冠)과 괵국부인(?國夫人 : 양귀비의 언니)의 야광침(夜光枕)과 양국충의 쇄자장(鎖子帳 : 보석을 쇠사슬 모양으로 장식한 휘장)은 모두 세상에 드문 보물로 그 값을 따질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