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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75010147
· 쪽수 : 262쪽
· 출판일 : 2025-09-26
책 소개
목차
1부
바다의 목소리
바다에서 오는 것들
오메 오메, 내 천금아
갈매기 조법
말이나 좀 섞어 봅시다
거시기 즈가부지
어머니, 저 새는
길 1 ― 찔 따라가믄
경엽 씨 것은 경엽 씨 마음대로, 내 것은 내 마음대로
국만 먹는 내 사람
자네 하나부지는
태풍의 마음
태풍이 또 왔단게요
바람이 분다
길 2 ― 당재 가는 길
표류를 해 보고 싶어
아이, 많이 따라왔다이
새각시 생겼든디
워메, 찌클어 부렀네
눈은 원래 게을러
도시고 댕긴다, 허부고 댕긴다
길 3 ― 녹산 가는 길
아시탕
청춘에 죽은
한잔만 갈아줘
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배가 고파
애정만 나믄
2부
길 4 ― 목너머 가는 길
말 못하는 술담배도 내 속을 아는디
그놈의 끗발 때문에
이, 들어왔구만
모래성
길 5 ― 신추 가는 길
고집이 찍찍 흐른다
가심에 피
양복 입고 칼 차고 베락 맞아 뒤질
바다여 내 노래를
이녁
돼지고기 안 먹습니다
할아부지가 거기 있었네
포트, 포트!
고마움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
바다가 보이는 역
마지못해
지나가기가 겁나 거시기합니다
풍어제
갈치가 안 나부러서
동도 아그들이 왔네
길 6 ― 울릉도 가는 길
터졌어?
하, 안개가 소리도 없이…
겁나게 착한 양반이여
소녀를 위하여
작가여, 어부여?
또 뭣을 집어 넌다냐
토요일이 삼 일 만에 돌아온다
봄이 왔당게
바다의 껍닥 같다니께
에필로그 – 이랬던 우리의 바다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거시기 즈가부지, 루부루가 그짝이 아닌갑소!”
파리 한복판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진 한국어, 중에서도 전라도 말. 목소리가 워낙 커서 전 세계 사람들이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는데 무슨 뜻일까, 저렇게 크게 말한 이유는 뭘까, 궁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종류의 지구인 중에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던 것.
나는 웃으면서 제자리에 섰다. 저 앞에서 걸어가던 거시기 즈가부지는 되돌아서서
“이짝이 아니믄 워딘디?”
대꾸했다. 나는 다가오는 전라도 아주머니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부루는 쩌어짝이요!”
아주머니는 반색했다.
“오메, 전라도 사람이요?”
루부루가 그짝이 아닌갑소!에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는가. 길을 잘못 들어왔다는 것 외에 단지 나는 한국 사람이고 그중에서도 전라도 사람이라는 뜻이지. 암튼 살면서 가장 먼 곳에서 들어 본 전라도 언어였다. 아주머니는 “고맙소이” 인사하고서 남편과 왼편으로 꺾어 ‘루부루박물관’을 향해 걸어갔다.
언어는 자기 것이고 자기 동네 것이다. 그러니 외국 가서 길을 모르면 힘차게 외치자. 한국말로. 그것도 자기 지역 언어로. 어디선가 알아듣는 사람 나온다.
―「거시기 즈가부지」 中
내 외가 중에서 큰집은 여순 사건으로 ‘아작’이 났었다. 그 집안 어른이 좌익에 연루되었던 것. 그분 아들들인 나의 당숙들은 줄줄이 유명 대학을 나왔으나 좌익 연좌에 걸려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연좌에 걸리면 공무원은 될 수도 없고 대기업에 들어가더라도 과장이 한계였다. 그래서 대부분 학원 강사를 했다. 돈은 잘 벌었지만, 인생이 돈 하나로만 이뤄지던가, 어디.
그중 한 분은 나와 술 마시면서 소설로 자신의 한을 풀어 달라고 한 번씩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찌 안 그러겠는가.
제주 가면 4·3으로 소설을 쓰라고 하고 광주에 가면 5·18로 소설을 쓰라고들 했다(5·18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광주에서 직접 겪었고 두 번이나 죽을 뻔했기 때문에 나중에 쓰긴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당숙은 천형 같은 집안 문제를 풀어내는 의미로써 써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한이 풀어질 거라 생각하셨을 거니까. 하지만 막막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삼촌, 이른바 가슴의 피, 그 한의 속성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절대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풀린다면 처음부터 한이 아니었던 거죠. 깊은 슬픔 정도?”
“…….”
“그러니까 삼촌의 한은 제가 소설을 써도 풀릴 수가 없겠죠.”
―「가심에 피」 中
이분, 남몰래 시(詩)를 썼다. 다섯 편 정도를 나에게 보여주신 적이 있다. 낡은 노트에 비틀 배틀 글자체와 틀린 철자법으로(글 쓸 때 이런 거 아무 상관 없다). ‘아, 살려고 시를 쓰시는 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중 한편 제목이 ‘소’였다. 소가 바닷가에서 계속 운다는 내용. 듣고 있던 할머니가 타박했다.
“뭔 소가 갱번(바닷가)에서 운다냐. 소는 산에서 울어야지.”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할머니, 여기서 소는 소가 아니고 사람이에요.”
한동안 있던 할머니는 그러나 끝내 수긍 안 하셨다.
“그래도 소라고 썼다메……. 소는 산에 있어야 써. 갱번에 있으면 안 돼.”
모든 시가 다 두루뭉술했기에 사연이 조금은 구체적으로 들어가기를 나는 희망했다. 그것만 들어가면 아는 곳에 부탁하여 문예지에 실리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분은 끝내 써 오지 않으셨다. 가심에 피, 인데 그걸 쓰자면 풀어지지 않는 그 아픈 사연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끝내 못 고쳤다고 나는 지금도 이해하고 있다. 진짜 한이며 가심에 피다.
할머니도, 그분도 다 돌아가셨다. 해소되지 않는 그 한(恨)의 핏덩이를 가슴에 안은 채.
―「가심에 피」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