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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세계의 종교 > 세계 종교의 이해
· ISBN : 9791185038179
· 쪽수 : 343쪽
· 출판일 : 2015-10-1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제1편 한얼과 생명
제1장 한얼론 - 12
1. 한얼 2. 한 3. 얼4. 한얼님
제2장 둥글론 - 23
1. 알 2. 둥글맘 3. 둥글선 4. 알다움
제3장 인간론 - 40
1. 사람 2. 나 3. 어린이와 어른 4. 아씨 5. 쾌락과 정조
제2편 인생과 죽음
제1장 인생론 - 66
1. 살이 2. 얼차림 3. 몸살이 4. 살맛 5. 얼살이
제2장 교제론 - 82
1. 얼굴 2. 어울림 3. 얼싸안음 4. 낮춤 5. 화술 6. 술버릇
제3장 사회론 - 104
1. 일 2. 돈 3. 다스림 4. 가르침 5. 베품6. 참음 7. 실속
제4장 우열론 - 142
1. 열등감 2. 쌍놈 3. 이름 4. 게으름 5. 꾀부림 6. 어리석음
제5장 죽음론 - 165
1. 건강 2. 두려움 3. 죽음 4. 안전 5. 떠남
제3편 종교와 대도
제1장 선악론 - 188
1. 모름 2. 빼앗음 3. 속임 4. 얽어맴
제2장 종교론 - 204
1. 얼림 2. 싸움 3. 이단 4. 뉘우침 5. 믿음 6. 뒤집기
7. 판가름8. 마루침?
제3장 대도론 - 249
1. 너그러움 2. 판밖 3. 쓸모 4. 얼잣대5. 열쇠 6. 미래불
7. 밝은임
제4장 수행론 - 282
1. 얼마 2. 바램 3. 괴로움 4. 가온 5. 얼닦기 6. 꿈7. 깨달음8. 셈 9. 일심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서문]
민요 가사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나!」
흔히들 집안에 경사가 났을 때 기뻐 덩실덩실 춤추는 모습이나 신명나는 장단에 맞춰 지르는 흥겨운 탄성이다. 어쨌든 기쁨이 그득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 ‘기쁨’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말의 기쁨은 ‘긔 + 쁨’이다. ‘긔’는 ‘그 + 이’로 ‘임’을 말한다. 선비에게 있어 ‘임’은 임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있어 ‘임’은 ‘하늘임’이다. ‘쁨’이란 ‘품어 안는다’는 뜻이다. 고로 기쁨이란 하늘임을 가슴에 영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쁨이다.
그렇다면 기쁨을 표현하는「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나」의 참뜻은 무엇인가?
얼씨구란 ‘얼을 세우다’란 뜻이다. 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한다.
절씨구란 ‘절을 세우다’란 뜻이다. 절이란 예를 다하여 섬기는 것이다. 진리인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 한다.
지화자란 ‘저 스스로 진리화 된다’는 뜻이다. 얼을 세우고 절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진리 자체로 화(化)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재세이화(在世理化)라 한다.
단군의 ‘홍익인간, 경천애인, 재세이화’ 사상은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란 타령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러니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가 아니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참 기쁨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말과 ‘얼’을 표리(表裏)로 인식하여 말속에 ‘얼’을 담아 민중의 삶과 어우러졌다. 그래서 흔히 내뱉는 말 하나 하나 속에는 ‘얼’의 향기가 물씬 배어 있다. 그러나 말에서 얼의 향기를 맡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 향기를 맡게 된다면 생활 속에서 저절로 얼이 빛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말이다. 말에 얼이 실리면 어찌 그 향기가 난초에 비하겠는가! 하는 말마다 ‘얼’의 향기가 난다면 자연히 어우러지고 얼싸안게 되어 살맛나는 세상이 되리라. 본서가 그런 세상의 조그만 씨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늘 깊은 가르침을 내려주고 계신 檀裔 金俊傑 사부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두서없이 떠든 글들을 옮겨 적느라고 애쓰신 편집부 직원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한’은 발음 자체의 특성으로 인하여 여러 민족에서 공유한다. 기록에 보면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수메르인들은 온 누리의 최고신을 ‘AN(안)’이라 불렀다. 어느 언어에서든지 ‘ㅎ’이 쉽게 묵음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AN(안)’과 ‘한’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수메르인들은 존경의 칭호로 ‘EN(인)’을 ‘AN(안)’ 뒤에 붙여 ‘ANEN(안인)’이라 불렀다. 우리가 ‘님’자를 붙여 ‘한님’, ‘하나님’ 하는 것과 흡사하다.
또 그들은 ‘함무라비’라는 인류 최초의 법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함무라비’란 우리말의 ‘한울아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울아비’란 예수가 즐겨 찾던 ‘하늘아버지’란 뜻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은 비단 수메르인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그 흔적이 나타난다고 한다. 가령 필리핀에서는 토속 하느님을 ‘Ama-Han(아마한)’이라 불렀고, 인도네시아에서는 ‘큰 주 하느님’이란 뜻으로 ‘Ke-tu-Han(커투한)’이라 불렀고, 미얀마의 한 부족은 ‘아버지 하느님’이란 뜻으로 ‘Pat-Han(팟한)’이라 불렀으며, 타이는 하늘의 신으로 ‘Khwan[콴]’이라 불렀다. 이렇게 ‘한’은 고대 수메르 문명의 이동 경로를 타고 온 누리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토착 문명과 융화되면서 종교적 잣대를 만들어 주었다. 따지고 보면 ‘한’을 받들자는 것이 유대교, 카톨릭, 기독교, 회교… 등이고, 스스로 닦아 ‘한’이 되자는 것이 불교, 도교, 선도… 등이고, ‘한’의 성품을 본받아 현실에서 마음을 닦자는 것이 유교인 것이다. 이렇게 ‘한’은 뭇 사상과 종교의 씨알이 되었다.
‘한’은 ‘진리의 존재’라는 뜻에서 출발했지만 세간에 퍼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은 절대 존재이기 때문에 둘이나 셋이 아닌 ‘하나’라는 수리(數理)적 의미가 파생되었다. 그리고 진리는 어둡지 않고 밝다란 의미에서 환하다는 ‘환’이 나왔고, 한정된 공간이라는 뜻을 지닌 ‘울’이 붙어 한울(하늘)이 되었다. 절대 공간인 한이 상대 공간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면서 ‘하늘’이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그 아버지인 ‘한’을 닮아 간혹 진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진리인 ‘한’에 복귀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하다’라고 표현하였고, 진리를 닮아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취하여 ‘하얗다’라고 하였다. 가득하고 크고 변치 않는 한의 성질을 본따 접두사로도 쓰였다. 가령 한 사발, 한창, 한길, 한사리, 한결같다… 등이 있다. 이외에도 나라의 가장 높은 임금님을 가리킬 때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말에 그 의미가 파생되었다.
우리나라의 이름도 어의 적으로 따진다면 ‘韓國(한국)’의 ‘韓(한)’으로 ‘한’을 대신할 수 없다. 나라 이름에 있어서는 한자를 버리고 그냥 한국, 한나라라고 해야 얼이 담긴 명칭이 된다.
이렇게 ‘한’은 절대 진리를 가리키면서도 상대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런 ‘한’을 노자는 도(道)라 불렀다. 道(도)는 ‘수首 + 착?’으로 머리 위로 올라간다는 회의문자이다. 머리 위란 곧 하늘이요, 하늘이란 진리인 ‘한’이다. 고로 ‘한’이란 도(道)가 지향하는 목적지이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지만 오직 도(道)로 들어서야 ‘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 알 사상은 우리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다. 중국이 용의 후손이라면 우리는 봉황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그래서 신라의 김알평(金閼平), 박혁거세(朴赫居世),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 고구려의 고주몽(高朱蒙), 가야국의 김수로(金首露) 등의 건국 시조들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우리 민족을 알타이족이라 하는 것 또한 ‘알’과 연관되어 있다. 알타이란 알다이로 ‘알 + 다이’이다. ‘다이’란 한자의 ‘如(여)’에 해당하는 고어로 ‘같다’, ‘답다’란 뜻이 있다. 즉, 알로 거듭나려는 민족이 알타이 족인 것이다.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강을 ‘아리수’ 또는 ‘아리’라 불렀고, 백제의 수도는 ‘아리(慰禮)’라 했고, 신라의 경주에는 ‘알천(閼川)’이 있었고, 압록강은 ‘아루’라 했다고 한다. 또 왕을 의미하는 백제의 ‘어라’, 신라의 ‘아로’ 부여의 ‘아란’도 모두 ‘알’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의 어원도 ‘알’과 연관이 있다. 대개 송화강 유역의 송말리(粟末里)란 지명의 중국식 발음인 ‘슈메로’에서 ‘수메르’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수메르란 단순한 지명만은 아니다. 수메르란 ‘숨아르’이다. 아르란 알을 조금 길게 발음하면서 혀를 위로 말면서 나는 소리이다. 알과 같은 것이다. ‘숨’이란 글자 그대로 호흡을 뜻하기도 하지만 고대에 ‘ㅅ’의 용도가 ‘신(神)’의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성’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수메르란 ‘신령스런 알’을 뜻하고 있다. 마치 우리 선조가 알을 숭상했던 것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알’ 사상은 수메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도 게르만의 아리야(arya)나 우랄 알타이어의 아루(Ar)가 그 한 예이다. 또한 ‘알’을 찬양하는 라틴어의 알렐루야(alleluia), 이슬람의 알라(allah), 인도의 아트만(atman), 그리스의 알파(alpha), 영어의 알(all), 아톰(atom), 알리바이(alibi)등이 그 흔적이다.
요컨대, 알은 열매나 씨앗의 의미를 넘어 하늘을 잉태하는 형이상적 의미로 쓰였다. 얼이 맺힌 씨앗이 알이므로, 이 알을 잘 다루어 싹을 틔우면 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믿었다. 이렇듯 알이란 한얼로 복귀하고자 하는 염원이 맺혀 이루어진 우리 겨레의 숭천사상(崇天思想)의 발로라 하겠다.
*우리의 국명인 Korea도 사실은 둥글다는 뜻에서 나왔다. 코리아는 고려에서 나왔고, 고려는 고구려에서, 고구려는 수메르어의 KUR(쿠르)에서 나왔다. 쿠르란 산이란 뜻도 있고, 산의 곡선을 따서 둥글다는 뜻도 더불어 있다. 우리말의 구르다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고로 우리의 코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의 이름이며 그 뜻은 둥근 나라이다.
한국은 한의 나라이고 코리아는 둥근 나라이다. 한이 둥근 것이요, 둥근 것이 한이다. 그래서 한사상은 둥글 사상이다. 둥글둥글하여 원만하고, 원만하여 모든 것을 포용한다. 속(俗)도 아니고 비속(非俗)도 아니면서 속(俗)도 되고 비속(非俗)도 된다. 삼라만상을 포용하지 않음이 없으면서도 늘 자연과 더불어 밝고 깨끗하기만 하다. 그래서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하며 이런 현묘한 도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둥근 것이 진리라는 사실은 빼먹지 않고 말하기를, “만물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도는 모난 것들을 꺾어 원만히 하고, 복잡한 것들을 풀어헤치고, 보이는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한다[도덕경4]” 하였다.
석가도 둥근 것이 깨달음의 궁극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원각경》에 이르기를, “마치 나무에서 생긴 불이 나무를 태우고 불도 꺼지듯이 무명이 없어지면 곧 원각(圓覺)이다” 하였다. 원각이란 깨달아 둥글게 되는 것이다.
장자도 거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장자》에 이르기를, “물이 말라 진흙 구덩이가 된 샘에서 물고기들이 서로를 위해 물거품을 적셔 주는 것이, 드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고 사느니만 못하다. 요임금을 성군이라 칭찬하고 걸왕을 폭군이라 헐뜯기보다는 양쪽을 다 잊고 둥근 도와 하나가 되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둥글맘! 이것이 바로 둥글둥글한 신바람을 일으켜 모(?)가 진 여타의 주의와 사상을 포용하여 신명나는 세상을 여는 활로이며 열쇠인 것이다.
*우리말에 ‘있다’와 ‘잇다’가 있다.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을 ‘있다’라 하고, 두 개체를 연결하는 것을 ‘잇다’라 한다.
‘있다’와 ‘잇다’는 발음상 구별이 없다. 이것은 ‘있는 것’을 ‘이어진 것’으로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는 삼라만상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진 원으로 본 것이다.
한자에도 비슷한 뜻을 지닌 율려 려(呂)자가 있다. 呂(려)에서 위아래의 ‘口’는 물체이고, 가운데 ‘ / ’은 끈이다. 삼라만상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체(口)와 물체(口)의 거리가 아무리 벌어져도 끈(/)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만물은 한 덩어리가 되어 늘어나는 율(律)과 줄어드는 려(呂)로 숨을 쉬며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공(空)을 가리키는 ‘뷔’와 아기를 밴다는 ‘붸’가 있다. ‘뷔’가 ‘붸’이고 ‘붸’가 ‘뷔’로 여겨 발음 차이를 두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공(空)에서 아기를 배듯이 유(有)가 생성되고, 또 이렇게 생성된 유(有)는 다시 본래의 공(空)으로 돌아간다. 바로 ‘뷔즉시붸 붸즉시뷔’이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 ‘I go’ 대신 ‘돌아간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이것이 바로 주객이 일체되어 하나로 돌아가는 우리의 얼이다.
이렇게 속(俗)과 성(聖)을 초월하여 속(俗)도 되고 성(聖)도 되며 둥글둥글 돌아가니 풍류지도(風流之道)라 하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은 한마디로 ‘인과관’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처럼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는 것이다. 손가락만 한 번 휘저어도 온 우주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만물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가정 아래 전개된 것이다.
최근 이론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이 못다 이룬 통일장 이론을 초끈 이론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초끈 이론 이란 만물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것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만 비로소 물리학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 전에 이미 우주의 시작과 끝을 연결된 원으로 보았다. 완전한 둥근 의식에 도달하면 순식간에 어느 공간이든 왕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우리의 이런 관념은 안중에도 없었다. 빅뱅에 의해 시작된 우주의 처음과 끝은 직선상에서 큰 거리로 벌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우리의 공간 초월의 관념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론화하고 있다. 공간과 공간은 웜홀이라는 통로로 이어져 있고, 절대 공간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이 웜홀을 타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직선적 물리학에서 둥근 물리학으로의 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선조가 수천 년 전에 이미 ‘있는 것이 이어졌다’고 본 것과, ‘뷔가 붸이고 붸가 뷔’라고 본 것은 정신세계의 무한한 잠재력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언어는 대략 200여종 되는데 그 중 공통되는 말이 일인칭 단수가 ‘N’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부족에 따라서 ‘Na(나)’ ‘Noyc(노이)’ ‘Nuy(누이)’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말의 ‘나’에서 나온 것이다.
1인칭인 ‘나’에 ‘ㅁ’을 덧붙이면 2인칭인 ‘남’이 된다. ‘나’에서 ‘남’이 비롯된 것이다. 다른 언어가 1인칭과 2인칭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의 언어는 그 차이를 좁혀 놓았다. 이것은 ‘남’과 ‘나’를 하나로 보는 한사상에 기인한다. 그래서 우리는 my house라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 한다. 하다못해 가족을 가리킬 때도 my wife, my father라 하지 않고 우리 아내, 우리 아버지라 한다. 우리는 주객이 일체된 조화에서 ‘나’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데카르트는 말했다. 지금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존재가 ‘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생각을 일으키는 존재가 ‘나’라면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지금부터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생각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생각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쭉날쭉 일어나고 가라앉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번뇌 망상이라 부르고, 이를 탈피하고자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녕 ‘나’란 누구인가?
* ‘사내아이가 울면 젖꼭지로 울음을 달래고, 계집아이가 울면 실타래로 아가리를 틀어막는다’는 풍토 속에 자라야 했던 여자의 일생은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부여 시대에는 여자가 질투를 하면 살해하여 그 시체를 산 위에 널어놓음으로써 그 악령을 증발시키는 풍속이 있었고, 고구려 중천왕은 질투하는 애첩을 가죽부대 속에 담아 수장시켰다. 후백제의 궁예는 질투하는 강씨 부인의 질부를 벌겋게 달군 쇠방망이로 지져 죽였고, 민간에서도 질투하는 여인을 발가벗겨 불에 달군 솥뚜껑에 앉혀 척괴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야말로 끔찍하기 헤아릴 수 없는 범죄가 수천 년 동안 저질러져 온 것이다.
이런 여성에 대한 비하는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든 대목이 그 첫 단추이다. 영어의 Man에 Wo를 붙여 Woman이라 부르는 것도 갈비뼈의 영향이다.
실 가는데 바늘 가듯이, 남자가 생겨나면 동시에 여자가 생겨나는 것이 불변의 이치이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남자를 만들고 그 무료함을 달래 주고자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상식 밖의 얘기이며, 더군다나 존엄한 생명을 한낱 남자의 노리개 정도로 전락시켰다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여자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면서 인류를 죄로 물들게 하였고, 그래서「민수기」에 보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여성을 가축으로 보고 인구조사에도 넣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성경》을 통틀어 조물주의 성별을 남성으로만 묘사한 것도 여성을 학대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조물주(?)조차 여자를 무시하니 남성들의 여성 학대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여자는 witch(위치)라 하여 마녀가 있지만 남자는 없다. 여자는 쉽게 악마의 포로가 되어 마녀로 둔갑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악마의 포로가 되었다는 얘기는 거의 없다. 있어야 마법사 정도인데 그 느낌이 단지 마술이나 좋아하는 짓궂고 괴팍한 사람 정도로 축소되어 있다.
결국 이런 관념은 14세기에 마녀사냥(witch hunting)을 불러오고 결국 60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여인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이런 여성 학대는 비단 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양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동양은 유교의 영향을 받으며 본격화되었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과 곤이 정해진 것이다” 하였다. 물론 자연의 이치를 설한 것이지만 이것을 해석하는 유학자들이 남존여비(男尊女卑)로 풀었다.
《서경》에서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라고 하여 직접적으로 여성을 격하하였다. 또한 맹자는, “남편이란 우러러보면서 평생을 살아야 할 사람이다, 순종하는 것을 바른 덕으로 삼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유교의 사견은 간통(奸), 망령(妄), 요괴(妖), 아첨(?), 더러움(?), 질투(嫉), 간사(姦), 음탕(?), 혐오(嫌), 모멸(?)…등과 같이 ‘계집 녀(女)’자가 붙은 글자를 비천하고 사악한 뜻으로 묘사했다.
원래 ‘계집 녀(女)’자 자체부터 왜곡되어 있다. 女(여)란 여자가 손과 무릎을 굽히고 복종하는 형상( )이다. 반면에 ‘지아비 부(父)’자는 채찍을 손에 들고 여자를 다스리는 형상( )이다. 그래서 ‘성낼 노(怒)’를 보면 여자를 때린다는 뜻으로 되어 있다.
서양에서 여성을 마녀로 몰고 간 것이나 오십보백보이다. 이런 관점을 지녔으니 공자가 3대에 걸쳐 부인을 쫓아낸 것도 이해가 될 만 하다.
어쨌든 유교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울)을 여성에게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전락시켰다. 이렇게 되자 ‘귀머거리 삼 년이요, 벙어리 삼 년이라’, ‘암탉이 울어 날 샐 일 없다’, ‘북어하고 팥은 두들겨 껍질 벗기고, 촌놈하고 계집은 두들겨 길들인다’, ‘여편네의 말은 잘 들어도 패가하고 안 들어도 망신 한다’, ‘여자 아니 걸린 살인 없다’… 등의 온갖 패설들이 줄지어 나오게 되었다. 참으로 돌이켜 보면 세상 천지에 이보다 잔인한 일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 증산은, “이 때는 해원 시대이다. 몇 천 년 동안 깊이깊이 갇혀서 남자의 놀림거리와 사역거리에 지나지 못하던 여자의 원을 풀어 정음정양으로 예법을 다시 꾸미리라” 하며 여성 학대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얼만 전 신문에 이슬람권 여인들에 대한 의식 조사가 나온 일이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부분 마호메트를 꼽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 대답이 가관이었다. 옛적에는 남자가 부인을 무수히 두어도 괜찮았는데 마호메트가 그 제도를 바꾸어 한 남자에 네 명의 부인까지만 두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가장 존경한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주지 않는 이슬람권 여인들의 비참함을 여실히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겨레의 여성관은 어떠한가?
우리의 말을 상찰해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우리는 주야(晝夜)라고 하지 않고 밤낮이라 하며, 남녀(男女)라 하지 않고 연놈이라 한다. 출입(出入)을 들락날락 이라 하고, 왕래(往來)는 오간다고 하며, 부모(父母)는 어버이라 하여 어머니의 ‘어’자가 먼저 나온다. 이와 같이 말 자체로 보면 음인 여성을 앞에 두었다. 실제로 고대에는 모계 중심의 사회가 팽배했다고 하는데, 당시는 우리 겨레의 전성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우리의 여성관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고고학에 의하면 청동기 시대 이전까지는 여성 상위의 모계 중심 사회였다고 한다. 모계 사회란 여자가 왕이 되고 남자가 신하가 되는 사회가 아니다. 힘이 센 남자가 여자를 잘 위하고 여자를 집안의 중심으로 삼아 존경하는 사회이다.
동물적으로 보면 힘이 센 남자가 무조건 우위를 점해야 하지만 당시는 밝은임 단군의 한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둥근 알을 숭상했다. 알은 곧 새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알을 뱃속에서 기르고 생명을 잉태하는 여자를 존귀하게 여겼다. 한자의 ‘클 태(太)’도 ‘大(사람) + . (알)’로, 알을 품고 있는 여자를 가리킨 말이다. 우리말로는 ‘아씨’라고 하는데, ‘아씨’는 ‘아기씨’의 준말로 성모(聖母)요 신녀(神女)이다. 그 원뜻은 원종(原種)으로 뭇 생명의 근원이다. 母(모)자를 태극(☯)의 형상으로 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아씨는 삶의 신이며 생명의 근원인바, 여기서 삼신할머니 신앙이 싹트기도 했다.
아씨의 뜻은 가족 구성원의 이름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란 ‘알버지’로, 알(씨)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한’을 붙이면 한아버지→할아버지가 된다. 할아버지는 하느님의 별칭이다. 실제로 함경도 지역은 할아버지를 큰아버지로 부르고, 할아버지는 하느님의 뜻으로만 사용한다. 어머니란 얼주머니란 뜻으로, 아버지의 알을 뱃속에 품고 그 속에서 다시 얼을 심어 자라게 한다는 뜻이다. 할머니는 한주머니란 뜻으로, 진리인 한얼을 품고 있는 사람이 된다. 역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지칭한다. 아줌마는 아기주머니로 어머니의 뜻이며, 아저씨는 아기씨로 아씨와 같은 의미이다. 아들은 ‘알든’으로 알(씨)이 든 자식이요, 딸은 ‘다알’로 알(씨)을 품는 자식이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는 알(씨)로써 가족의 이름을 정했으니, 이것은 곧 자연의 현묘한 도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에 높고 낮음도 없고, 귀하고 천함도 없다.
가장 존귀한 하느님을 가리킬 때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삼신할머니가 그 흔적이다. 삼신이란 생명의 근원 신으로, 이는 곧 하느님을 말한다. 단지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자손의 점지를 맡은 조상 계열의 신 정도로 개념이 축소되어 있다.
여하튼 남자와 여자 모두 진리에 동등하며 서로의 구실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이성관이다.
*밝은 임 단군께서는 나라를 세우시면서 천부인이라는 청동검과 청동거울과 방울을 통치의 이념으로 세우셨다. 이 가운데 청동검이란 옳고 그름을 정확히 갈라 강력하게 집행하는 사법의 정신이다. 청동 거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공평하게 고려하는 입법의 정신이다. 방울은 그 모양이 원 속에 반지름을 표시하는 선이 있는데, 이 선이 원이라는 진리를 변하지 않게 하는 진리의 잣대이다. 이것으로써 다스림을 행하는 것으로 바로 행정의 정신이다. 단군의 천부인이란 이렇게 입법과 사법과 행정의 조화인 것이다. 이 가운데 사법에 해당하는 청동검이 바로 활인검의 원조이다. 물론 예수가 말하기를,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마태오26:52]” 하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광분하여 칼을 휘두르는 검객을 진정시키려면 더 강력한 칼로 위협을 해서 정신이 들게 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살고 그 검객도 살리는 것이 보다 현명한 길이다.
얼마 전 연쇄 살인범 정두영이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그는 부산과 울산 일대에서 10명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986년 6월에 부산 망미동에서 자율 방범대원 김모 씨를 살해하여 12년을 복역한 후에 저지른 만행이라는 점이다. 사람을 죽여도 겨우 12년만 살면 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기에 생긴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가벼운 법이 10명의 무고한 백성을 죽게 하였고, 결국 정두영이 또한 죽게 만든 것이다.
한자에 ‘다스릴 균(勻)’자가 있다. ‘二(천지) + ?(에워쌈)’으로, 천지의 순리에 맞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二(천지)’가 비딱하게 되면 ‘말 물(勿)’자가 된다. 순리를 어기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도 계속하면 칼(刂)로 목을 베라는 뜻에서 ‘목 벨 문(刎)’자가 된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자(勿)를 모두 감옥(□)에 쳐 넣게 되면 ‘완전할 홀(囫)’자가 된다. 이렇게 악(惡)을 그때그때 잡아넣고 강력히 처벌해야 비로소 세상이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勻(다스림)을 하기 위해서는 勿(죄인)의 목을 베던지(刎), 아니면 감옥(□)에 가두어 세상과 격리시켜야만 세상이 평정(囫)되는 것이다. ‘勻(균)→勿(물)→刎(문)→囫(홀)’의 이치를 따랐다면 정두영이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한자의 다스릴 윤(尹)자를 보면, ‘手(손) + ?(칼)’로, 손에 칼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이 칼이 바로 활인검이다. 이제 단군의 활인 청동검이 다시 나와 이상 사회의 움을 틔울 때도 되지 않았을까? 명초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참된 민주주의는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이끄는 주의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참으로 좋아질 수 있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주의여야 한다. 참된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主[진리]의 주체가 되는 주의여야 한다. 우주와 인생의 참 주(主)는 한얼이다. 한얼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한얼에 따를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풀려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한자에 ‘잠깐 乍(사)’자가 있다. 乍(사)는 ‘人(사람) + ㅑ(지게)’로, ‘ㅑ’은 지게의 형상을 본뜬 글자이다. 따라서 乍(사)는 시체를 지게에 실은 형상으로, 인생은 이와 같이 잠깐 사이에 끝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시체가 될 몸뚱이를 보존하기 위해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걱정은 몸뚱이에 집착하는 것에 비례해서 온다. 비단 옷을 걸치고 산해진미를 뱃속에 넣으며 매일 같이 시녀들의 안마를 받는 몸뚱이는 죽음을 생각하기조차 싫어한다. 그래서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에 힘썼고, 이집트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를 만들고 미라가 된 것이다.
《통속편通俗編》에 이르기를, “편안하게 잘 죽는 것이 고달픈 삶만 못하다” 하였고, 우리 속담에,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하였다. 바로 이런 몸살이 위주의 생각들 때문에 진시황이나 파라오 같은 짓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장자》에 이르기를, “자연은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우리에게 죽음을 주어 편히 쉬게 한다” 하였다. 죽음을 안식처로 생각하는 데에 바른 삶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대문 밖이 저승이라고, 그만큼 죽음은 쏜살같이 다가온다.
《장자》에 이르기를, “삶을 죽이고 초월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반대로 삶을 탐내어 영속하려는 자에게는 삶이 없다” 하였다. 진시황이 삶을 탐내어 불로초를 구하게 하고 온갖 방술가를 동원하여 내단(內丹)을 복용하였지만 결국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10만 명을 30년 동원하여 피라미드를 짓고 미라가 되어 부활을 꿈꿨지만 역시 죽음에 맞서지 못했다.
한 마리의 사마귀가 앞발을 쳐들고 수레바퀴에 대든다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처럼 무모한 짓을 벌였던 것이다.
한자에 보면 ‘굽을 굴(屈)’자가 있다. ‘尸(시체) + 出(벗어남)’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몸부림치다가 망가지는 형상이다. 죽음을 거부해서는 ‘얼’이 혼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혼미할 란(不死)’자를 ‘死(죽음) + 不(부정)’으로 그린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죽음만은 피할 길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한자에 간다는 뜻의 거(去)자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것인가?
그 구조를 보면 ‘土(흙) + 厶(나)’이다.〈소전〉에 보면 마늘 모(?)는 자신의 물건을 싸 놓고 있는 형상(б)으로, ‘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去(거)는 ‘흙 속에 묻힌 나’라는 뜻이다. 바로 태어나는 순간 무덤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권위, 명예, 물질, 쾌락····· 등은 인생의 즐거움을 보장한다. 즐거울수록 허무는 멀어지고, 허무가 멀어지면 죽음을 외면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그 순간 극심한 허무감에 휩싸이며 공포에 떨게 된다. 즐겁거나 고통스런 꿈속에 흠뻑 취해 일생을 보내고 나니 결국은 무서운 해체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질풍이 불 때라야 경초를 알게 된다” 하였다. 경초(勁草)란 억센 풀이다. 거센 바람이 불어야 경초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해서야 사람의 진모를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