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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와 소월

동주와 소월

김소월, 윤동주 (지은이), 유필 (엮은이)
밀리언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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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와 소월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동주와 소월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5046174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17-04-16

목차

part 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part 2 쉽게 씌어진 시
part 3 무얼 먹구 사나
part 4 화원에 꽃이 핀다
part 5 님에게
part 6 반달
part 7 진달래꽃
part 8 엄마야 누나야

저자소개

김소월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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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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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필 (엮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 출생. 칼럼니스트 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내 아들에 세상의 도전에 당당하게 맞서라’ ‘그대 사랑 가시에 찔린다 해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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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사실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 때문이었다.
이런 늠름한 청년이 어떤 시를 썼을까, 좋게 말하자면 관심,
속된 말로 한 번 평가해 볼까하는 오만한 속셈이 있었다.
짙은 지적 분위기, 그야말로 먼지 한 점 머물지 못할 깨끗한 얼굴,
과연 지난 시절의 대학생은 이런 사람들이었구나, 가슴 한편에 뜻 모를 그리운 감정을
몰고 올 만큼 첫인상은 매우 선명했다.
그런데 일본인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절대로 쓸 수 없는 그 청아하고 강렬한 시 한 구절만으로도
나는 이 젊은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데, 영문학 85점, 동양철학사 80점을 비롯
한 모든 성적이 우수한데도 그를 지도했던 교수의 기억에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윤동주의 깊은 고독을 절절한 가슴으로 느꼈다.
장수할수록 쓸모없는 수치만 쌓이는 일반적인 인생과 달리 윤동주는 요절했다.
요절은 시인의 특권이라지만 그는 사고나 질병에 의해 삶을 마감한 것이 아니다.
1945년 조국의 독립을 불과 반년 앞둔 만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릿쿄 대학 영문과에 유학한 후 곧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옮겼으나
독립운동 혐의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내진다.
거기서 그는 내용을 잘 모르는 정체불명의 주사에 시달린다.
사망 직전 모국어로 무슨 말을 크게 소리치고 숨을 거두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일본의 간수는 몰랐다.
하지만 “동주 씨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고함을 지르며 절명했습니다.”
라는 증언은 남았다.
-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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