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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기타국가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91185051062
· 쪽수 : 600쪽
· 출판일 : 2013-06-19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다. 작고 귀여운 천사의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로 살포시 흘러 내려와 있다. 그 머리카락을 만지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그는 잘 안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햇볕에 살짝 그을린 목덜미와 부서질 듯 가녀린 등뼈를 드러낸 채 열심히 휴대전화를 두드리고 있다. 그는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해 인기척을 냈다. 그녀가 얼굴을 반짝 들었다. 그녀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미소는 입가에서 시작돼 천천히 온 얼굴로 퍼진다.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신뢰감으로 가득 찬 짙은 눈동자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니 아파왔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전부 그녀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뭐든 돈 안 드는 방법을 통해 이 비참한 생을 일찌감치 마감했을 것이다.
“안녕, 아가씨.”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바로 내렸다. 그녀의 피부는 보드랍고 따뜻하다. 늘 그렇지만 처음에는 그녀를 만지는 게 쉽지 않다.
“엄마한테는 어디 간다고 했어?”
“제시네 집에 간다고 했어요. 양아버지랑 무슨 파티 같은 데 간대요. 소방서에서 하는 거라든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휴대전화를 빨간 배낭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래?”
그는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나 이웃에서 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흥분에 가슴이 떨리고 무릎이 휘청거렸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놨어. 어서 들어가자.”
피아는 감식반 직원들이 지나가도록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직원 둘이서 소녀의 시체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이건 뭐 종잇장처럼 가볍군. 뼈하고 가죽만 있는 것 같아.”
직원 하나가 말했다. 피아는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죽은 소녀는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민소매 셔츠에 짧은 청치마를 입었는데 치마가 위로 말려 올라가 허리께 뭉쳐 있었다. 조명이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시커먼 멍 자국과 길쭉한 상처가 죽은 소녀의 비쩍 마른 몸뚱이를 뒤덮고 있는 게 분명히 보였다.
“헤닝, 이거 멍 자국 아니야?”
피아가 소녀의 배와 허벅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음, 그런 것 같은데.”
헤닝은 손전등으로 소녀의 몸을 비춰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맞아. 멍 자국과 열상이 아문 흔적이야.”
헤닝은 소녀의 손을 번갈아 가며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크뢰거.”
“왜?”
“이 시체 뒤집어도 될까?”
“응.”
헤닝은 피아에게 손전등을 주고 장갑 낀 손으로 소녀를 조심스레 뒤집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피아가 기겁해서 외쳤다. 등 아랫부분과 엉덩이가 완전히 헤져서 근조직 사이로 척추, 갈비뼈, 골반의 일부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배의 스크루 때문에 난 상처야. 이 아이는 오늘 저녁에 죽은 게 아니야. 그리고 여기서 죽지도 않았어. 손의 상태만 봐도 물속에 있은 지 한참 된 거 같아. 강물에 떠내려 온 건지도 모르지.”
“그 말은 이 아이가 다른 학생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야?”
피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난 법의학자일 뿐이야. 그걸 알아내는 건 당신 몫이지. 분명한 건 오늘 죽은 게 아니라는 거야.”
아버지가 종이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더니 다른 원피스를 꺼냈다. 삼촌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그 빨간 원피스와 어머니가 신는 것 같은 진짜 실크 스타킹을 입혀주었다. 삼촌이 허리에 붙어 있는 리본을 어떻게 매야 하는지 몰라 허둥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어찌나 우습던지!
그런데 그 원피스는 정말 예뻤다. 빨간색 공주 드레스에 빨간 구두. 구두에는 굽도 달려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도 뿌듯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거실을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치 결혼식 행진을 하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 삼촌이 먼저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장에 덮개가 달린 진짜 공주 침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무슨 놀이 할 거예요?”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할 거야. 옷도 갈아입을 거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나간 뒤 그녀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뜀을 뛰었다. 그리고 아까 모두들 그녀의 드레스에 감탄하며 칭찬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늑대가 나타났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늑대 분장을 한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이런 비밀 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건 나중에 그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