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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5260457
· 쪽수 : 140쪽
· 출판일 : 2021-04-23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씨앗의 배후 12
몽상의 어깨 위에서 15
나무의 주저흔 18
훈자의 길 위에서 21
허공, 황금 작약에게 23
역 25
그린란드 28
장엄현상학 30
월식 32
금빛 말 33
귀경게 34
염장이의 노래 37
제2부
말과 여자 40
보길도 세연정에 들다 43
시인 46
불멸의 시 48
몸, 안거 50
화엄의 시 52
겨울꽃 54
두충나무가 있는 풍경 56
내게 황금보탑이 있다면 58
수국 60
우박 61
숲 지나 숲 64
제3부
아브젝시옹의 침대 66
푸른 벽을 세우다 69
나는 이제 금기를 말하련다 72
은사시나무 74
붉은 말 76
마른 비 78
길에서 80
산천어 82
정적 속에서 84
물드는 숲 86
무적 89
겨울, 저녁 불일암에서 92
광원암 도라지부처꽃 94
제4부
밀주密呪의 봄 98
존재 실상의 붉은 꽃 100
화살 법문 102
집착에의 장사진 104
화엄사 괘불 106
정혜사 108
송광사 하안거 110
전등사 붉은 새 112
청동거울의 봄 숲에서 114
인도보리수 116
산사의 꽃양귀비 118
빛고을 연등 축제 120
유골을 찍다 122
미황사 첫 매화 124
해설 절벽 혹은 절정의 시학|오민석 128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허공, 황금 작약에게
흰 코끼리가 숲으로 사라집니다 당신을 지나온 빛줄기가 숲에 드니 상아가 긴 황금 작약이 옵니다 바람이 붑니다 황금 작약의 시간에 누가 성벽을 쌓나요 형상 없는 그림자 비밀을 떠나보낼 빈병을 준비합니다 태풍의 혀가 백비 사이에서 침묵하는 동안
절벽이 여럿 있는 바위산이 붉은 알을 품습니다 여린 싹 연두 구름 한 방울이 눈을 반짝이며 당신에게 오릅니다 쿵 가슴으로 쓰러진 구상나무를 일으켜 세웁니다 천둥소리를 내는 두꺼운 책이 자랍니다 책장은 연비를 새기는 칼날입니다
벌거숭이 사랑은 없습니다 태양을 입고 별을 걸고 장마 망토는 부은 뒤꿈치를 덮습니다 목어가 침묵 사이를 떠다니고 있어요 물방울이 여린 줄기 식물처럼 올라가 은빛 구름이 됩니다 애절한 듯 절망이 눈부시게도 꽃피네요 황금 작약이 흔들리며 가득 피다가 입을 오므리는 동안 허공은 허공인 채 있습니다
불기둥을 숨긴 회오리 사이로 지나가는 붉은 절벽을 봅니다 당신의 따뜻한 몸을 만지고 향기를 맡습니다 씨앗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귀머거리와 광막한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 먼 자 꽃비가 내립니다 머물던 바위가 코끼리 걸음으로 파도소리를 냅니다 예전 당신은 어디선가 피고 지었다가 익숙하고 낯선 풍경 새로운 당신이 옵니다
황금 작약과 코끼리는 바위산을 오르는 허공입니다 당신을 너무 늦게 알거나 영영 모르거나 당신은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지금 여기 있습니다 영영 사라지는 것은 없어서 우연인 듯 황금 작약이 핍니다
훈자의 길 위에서
극한을 중심에 두다니요 산사태가 나고 있는 절벽 빙판 길을 건넙니다 죽음의 돌을 피하려는 커다란 눈의 필사적 질주 죽음으로 둘러쳐진 외길 끝은 닿은 듯하면 휘돌아 또 보이지 않습니다 시퍼런 냉기 외면하느라 딴 세상 낯선 이야기처럼 죽음을 말하고 풍경을 그립니다 여자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어요 연인이 추락했어요 얼굴에 달라붙는 철갑 날벌레를 쫓아내며 절벽에 붙어 울지도 못했죠 울음을 들어줄 신도 다른 무엇도 없단 걸 알죠 연인의 시체는 절벽 아래서 얼어가고 여자는 적막한 비명처럼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죠 하늘은 까마득하고 낭떠러지 아래도 까마득한데 닿는 것은 찰나죠
마을 황량한 벌판에는 눈코입귀를 다 닫아버려서 얼굴과 몸통이 구분되지 않는 검은 염소 시체 뺏기 시합을 하죠 말은 염소 시체에서 달아나려는데 남자가 죽은 염소 뒷다리를 낚아채려고 해요. 다른 말을 탄 남자가 앞다리를 잡아당겼는데 눈 감은 머리였어요 죽은 염소가 충혈된 눈을 번쩍 떴어요 말은 절망을 낚아채는지 체념을 낚아채는지 승리는 말에 둘러싸여 필사적으로 죽음의 먼지를 쿨럭하며 뱉어냅니다
여자는 염소에게 먹일 풀을 가지러 죽음의 다리를 건넙니다 지난여름 창고에 쌓아둔 풀의 시체를 한 짐 지고 죽음으로 듬성듬성 엮은 외줄 다리를 건너죠 언제 뒤집어질지 모를 다리를 필사적으로 건넙니다 까마득 아래 언 강은 허연 몸을 비틀며 계곡에서 계곡으로 휘돌아나가는 동안 풀짚덩이 시체는 죽음의 계곡을 지나 마을로 듭니다 죽음을 건너온 여자는 깨금발로 푸슬한 벼의 시체를 나누어 먹어요 상기된 볼이 불룩합니다 마른 풀을 먹고 염소가 살아요 죽음을 먹고 살아요
죽음 안의 삶은 필사적으로 느긋해요 죽음은 죽음대로 삶일 뿐이죠 그냥 살아낼 뿐이죠 설산을 배경으로 노란 꽃이 솟아나고 있어요 거대한 손이 앙증맞은 꽃을 쥐고 있죠 시체에 발을 묻어서 꽃은 더욱 샛노랗고 멀리 설산은 더욱 지당한 은빛입니다.
푸른 벽을 세우다
물비린내 나는 짠 비석이
즐비하게 쓰러져 누운
봉인된 심해가 있더라
뱃길을 알기 전 마른 눈물이 되어서
화석이 된 이름
찢어진 푸른 벽
벌어진 상처와 끊어진 숨이
무심한 허공에 가까스로 토해내는
물거품의 시퍼런 수심
애기가 우네 비석이 우네 깡마른 물고기의 태생은 비밀이니까 울컥울컥 비린내 나는 울음통인 생
비망록 적힌 흰나비떼가 난다
망망대해 적막 섬
바위는 깎인 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부르지
어떤 고아는 생의 굽이마다 절벽이고
가라앉지도 떠 있지도 못하는 거울이 구름 그림자를 데리고 심해를 떠돈다 가파른 시절을 우는 애기들은 절벽이 되어 캄캄한 비석을 달랜다지
비석은 심해를 바로 세우려 울고 또 운다지 절여져 질펀한 울음을 견디느라 파도는 절벽 애기 발잔등에 엎드려 울고 비석은 누워있는 세상을 일으키느라 어제의 구름을 부르고
충혈이 된 파도 뻑뻑한 눈동자는 젖은 비석의 이름을 더듬는다 닫힌 문은 기억을 매장하는 습성이 있음으로 애기섬은 운다 해저에 누운 비석이 뒤척일 때 침묵하던 해풍이 인다
세상 절벽 품고 우는 애기
우리 애기야 가지를 뻗어라
울음은 윤슬로 글썽이고
누군가는 못 보는 청고래 떼가 온다
불러도 돌아올 수 없으면
뭉쳐지지 않은 슬픔이면
절망을 가로질러
바다를 가로질러
세계를 가로질러
묘비명을 읽은 하늘이 되거라
고요한 비석 안에서 피가 흐르고
바다가 투명하게 일렁이며 바닥을 드러낸다
진실은 눈을 반짝이며 바다에 닿는다
애도의 배가 바다의 갈라진 상처를 깁는다
푸른 벽이 일어난다
역사의 흉터에 푸른 날개 솟으니
울음 없는 바다 위에
해후하여 비상하는 청청 눈부신 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