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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지배영역

생명의 지배영역

로널드 드워킨 (지은이), 박경신, 김지미 (옮긴이)
  |  
로도스
2014-08-29
  |  
2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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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지배영역

책 정보

· 제목 : 생명의 지배영역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윤리학/도덕철학
· ISBN : 9791185295121
· 쪽수 : 404쪽

책 소개

비오스 총서 2권. 드워킨은 법철학자이기 전에 변호사이다. 그는 법철학의 추상적 논의는 현실세계의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목차

목차
빈티지 판에 대한 서문 7
발간사 15
역자 서문 19
1장 생명의 가장자리 39
2장 낙태에 대한 도덕 77
3장 무엇이 신성한가? 129
4장 법정 속의 낙태: 제1부 172
5장 헌법적 드라마 193
6장 법정 속의 낙태: 제2부 231
7장 죽기와 살기 270
8장 이성 너머의 삶 324
미주 355
감사의 말 377
찾아보기 381
비오스총서를 펴내며 401

저자소개

로널드 드워킨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북동부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Providence)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옥스퍼드 대학 법학과와 하버드 대학의 로스쿨을 졸업했다. 뉴욕 소재 유명 로펌인 설리번&크롬웰(Sullivan & Cromwell)에서 근무하다가 예일 대학 로스쿨에서 강의하면서 학계로 진출했다. 1969년 스승이었던 하트(H, L. A. Hart) 교수의 후임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후 런던 대학(UCL)과 뉴욕 대학(NYU)에서도 가르쳤다. 주요 저서로 대표작인 『법과 권리』(염수균 옮김, 한길사, 2010)를 비롯, 『법의 제국』(장영민 옮김, 아카넷, 2004), 『자유주의적 평등』(염수균 옮김, 한길사, 2005), 『생명의 지배영역』(박경신 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2008 / 로도스, 2014), 『민주주의는 가능한가』(홍한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신이 사라진 세상: 인간과 종교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들』(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2014), 『정의론: 법과 사회 정의의 토대를 찾아서』(박경신 옮김, 민음사, 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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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신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자문위원, KAIST 생명윤리위원회 위원, 한국법철학회 국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 이전에는 하버드대학 물리학과와 UCLA로스쿨을 졸업한 후 미국 노동단체 및 한국의 법무법인 한결 그리고 한동대학교에서 변호사 및 학술활동을 하였다. 저서로 『진실유포죄』 『사진으로 보는 저작권, 초상권, 상표권 기타 등등』 『표현· 통신의 자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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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옮긴이)    정보 더보기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1960~70년대 한국 영화의 여성 주체 재현 방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영화와 문학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필름 세익스피어』 『영화와 시선. 복수는 나의 것』의 공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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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 빈티지 판에 대한 서문

이 책은 죽음과 삶에 대한 책이며 죽음이 삶에 그리고 삶이 죽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그 예로 현대의 도덕 문제로 가장 열띠게 토론되어온 낙태와 안락사를 다룬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제기된 낙태에 대한 주장으로 인해 이 책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장기적으로 이 책의 안락사에 대한 주장 - 이 책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죽을 권리에 미치는 영향 - 은 더 급진적이고 더 논란을 불러 일으킬만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에서 더 중요하게 나타날 수 있다.
두 문제 모두 생식에 관해 인류가 스스로를 통제하는 새로운 문제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쉬워 보일 수 있다. 이 고통스러운 질문들은 우리의 과학과 의학 -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에 발표된 유전학과 생식공학의 새로운 기술적 발전들 - 에 의해 유발되었지만 그 질문의 구조는 이 책이 다루고 있으며 이 책의 내용을 주로 지탱하는 개념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즉 모든 형태의 인간생명은 내재적인 신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출생과 삶에 대해 내리는 모든 결정은 이 심오한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내려져야 한다는,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 말이다.
우리는 종교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대에 와 있다. 이 시대는 역사가 18세기 이래 떠나기 시작한 오랜 종교시대와는 매우 다르다. 18세기 이후 우리는 이렇게 전 우주적인 규모의 문제를 공적으로 다룰 것을 요구 받지 못했다. 우리는 개인적 신념으로 남게 된 종교적 논점들과 정치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세속적 논점들 사이의 구분을 즐겨왔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된 그리고 가장 논란이 될 주장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이제 대면해야 하는 생식과 죽음에 관한 논점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일 뿐 아니라 아직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위협적일 미래의 문제들에 이르게 되면 이 종교적 본질은 더욱 명백해지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논점들이 종교적인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뿐만 아니라 종교적 양심의 자유가 중요한 이유와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나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정치를 통해 개인의 의무에 효력을 부여하는 방법에 대해 새롭게 배워야 한다. 낙태와 안락사로부터 시작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지배영역이 세심한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행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이 평론가들이 제기한 몇 가지 논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나의 정치적 기대치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내가 이 책을 통해 낙태금지법을 추진하는 이들이 플래카드를 내려놓고 선택권옹호론자들의 진영에 합류하기를 기대한다고 생각했고, 비판자들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나의 기대와 달리 선택의 자유를 반대하는 이들을 추동하는 동인은 이와 같은 논증에 반응하기에는, 평가나 이성이 닿지 않기에는 너무 깊이 비이성적인 곳에 있다고 믿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를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낙태시술소 앞에서 의사들에게 총을 쏘려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설득될 가능성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 이 책을 읽을 가능성도 매우 낮다.
나는 다른 야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주장들이 타당하다면 그 주장들이 “미국인들과 자유가 존중되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이 정치적 논란에 대해 논쟁의 양측 모두 존엄을 잃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적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라도 가져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해결책을 갈구하고 있지만 여성에게 임신 초기의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하는 어떤 형태의 정치적 타협도 그들이 가진 원칙에 배반될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망설여왔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존엄성과 타협하지 않고는 그와 같은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낙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권리에 대한 가장 극악무도한 침해이자 양심을 가졌다면 절대로 방기하거나 용인할 수 없는 범죄인 살인이라는 전제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이 들을 용의가 있다면 이들이 자신의 신념의 전제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자 한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이 도덕적 논쟁을 바라보는 설득력 있는 관점 중에는, 낙태가 도덕적으로 사악하다고 열렬하게 믿으면서 동시에 산모가 자신의 신념의 허락이나 요구에 따라 자유롭게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열렬히 믿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점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자 한다. 이것이 이 책의 종교적인 야심이다.
어떤 비판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낙태관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비판자들에 따르면, 태아가 스스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낙태는 살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믿는다. 비판자들은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입장과 충돌하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며 이 입장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들은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일관된 입장을 갖거나 그들의 입장이 합리적이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관대하지 못한 지적이며 타인의 생각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데 있어서 너무 미숙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주장들이 타당하다면 사람들은 잉태 시점부터 태아가 자신의 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런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네모난 원의 존재를 믿는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다닐 때 우리는 실제로 그들이 원이 네모나다고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그들의 말과는 다른, 그들의 의도한 다른 일관성 있는 뜻을 찾아서 이 말에 의미를 부여할(attribute) 것이다. 태아가 스스로 정신적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스로의 이익을 갖는다는 생각은 네모난 원처럼 명백한 자기모순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모순적인 생각을 한다고 여기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보다 더 노력해야 하며 바로 이 노력을 내가 하려고 한 것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나의 주장의 다른 부분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제5장의 미국헌법 해석론에 대한 논의가 두 개의 극단만을 다룰 뿐 두 극단 사이의 온건한 관점들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걱정한다. 나는 오직 두 극단만을 소개하였다. 첫 관점은 변호사와 판사들이 헌법의 추상적 조항(낙태나 죽을 권리에 대한 법적 논의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적법절차나 평등보호조항처럼)도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이 조항을 제정한 정치인들이나 정치가들의 기대치 내로 최대한 그 효력을 한정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두 번째 관점은 이 추상적 조항들이 판사나 변호사들이 도덕적 원칙들로 적용해야 할 추상적 도덕원칙들을 규정한 것이며 이 조항의 제정자들의 실제 기대치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판례들과 과거의 정치적 전통과의 일관성과 정합성에 의해 한정된다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 관점을 지지한다.
헌법해석에 있어 두 극단 사이의 중간적인 접근법이 있다는 생각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나의 제5장에서 이미 내가 설명한 두 극단 사이에 낄 수 있는 원칙적인 접근법은 실제로 없다고 주장하였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헌법 제정자들이 자신의 어떤 신념들에는 부합하고 어떤 신념들에는 부합하지 않도록 구성한 일반원칙의 추상을 훼손하는 것은 자의적이다. 물론 이와 같은 나의 견해가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비판자들은 왜 옳지 않은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어떤 그럴 듯한 중간적 관점도 조리 있게 제시되거나 변호된 적이 없다.
이 책은 이 책의 출판시점까지의 미국과 그 밖의 나라에서의 낙태와 안락사 논쟁의 최근 역사를 다루고 있다. 지금은 그 역사에 더할 것이 거의 없다. 1993년 7월 연방하원은 의외로 큰 표차로 메디케이드(Medicaid)1) 수혜금으로 빈곤한 여성의 낙태를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Hyde수정안을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하원은 금지에 대한 예외의 범위를 더 넓혀 원래 산모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 필요한 낙태의 지원만을 포함하였던 것을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비롯된 임신의 낙태의 지원도 포함하도록 하였다. 상원은 하원의 법률안과 예외조항들을 채택하여 1993년 3월에 법제화가 이루어졌고 클린튼 대통령은 1994년 1월1일 명령을 발효하여 주정부들이 예외가 인정되는 상황에서는 낙태비용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클린튼의 보건안전법(Health Security Act) 초안은 1993년 가을에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낙태비용에 대한 보험을 보험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건강보험의 일부로서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의회가 Hyde수정안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평론가들은 의회가 전국적 보건의료제도의 한 부분으로 그와 같은 조항을 승인할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미국에서 안락사에 대한 기사 제목들은 이제 20명의 자살에 입회한 잭 케보키언(Jack Kevorkian)박사의 활동들로 도배되어 있다. 케보키언 박사는 1993년 11월에 자살을 도와주는 것을 금지하는 새 미시간주법의 위반으로 구금되었다가 단식농성으로 15파운드가 빠진 상황에서 풀려났다. 세 명의 미시간 주 하급심 판사들에 의해 이 법은 위헌판단을 받았고 미시간 주 항소법원의 판결이 곧 나올 예정이다.
1994년 2월 영국대법원의 특별위원회는 많은 이들이 기대한 바대로 자발적 안락사를 허용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 위원회는 이 책에 실린 그런 법개정을 요구하는 많은 주장들을 상당히 고려하였으나 두 가지 이유로 반대의견을 냈다고 하였다. 첫째 남용을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법을 만들기가 어렵고 둘째 고령자와 환자들이 죽기를 요청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그래야 한다는 압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제7장에서 왜 이러한 주장들이 불충분한지를 설명하였다. 사실 위원회 스스로도 의사들이 무의식 상태의 환자들의 생명유지활동을 언제 중단할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더 많은 재량을 가질 것을 조언하였는데 이 재량 역시 남용의 여지가 있고 친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조언하였던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위원회의 주장이 자발적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서 변화가 지속적으로 요청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로널드 드워킨

1994년 3월


▲ 역자 후기

생명, 드워킨 법철학의 근원
우리나라에서는 판례와 제정법을 포함하는 실정법의 개념주의적 또는 문언주의적 적용 내지 포섭에만 충실한 법실증주의적 성향과 실정법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판례들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뿐 법적 비판을 거부하는 성향이 강하게 존재해왔다. 거꾸로 흐르는 이 두 개의 흐름은 법의 권위를 더욱 저하시켰다. 한편에서는 실정법이 담지하고 있는 인권과 평등에 대한 장대한 소망을 포기하고 그 문언과 개념을 제정자들의 인색한 의도에 맞게 한정적으로 해석해오면서 국민이 법에 대해 실망하도록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실정 판례들에 대한 법적 비판이 포기되면서 장래 판례들을 비판할 준거들이 개발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드워킨이 우리나라의 법치주의 발전에 끼칠 수 있는 잠재적인 영향은 지대하다. 드워킨은 법을 사회학적 또는 정치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법현실주의자도 아니며 실정법을 통제하거나 관통하는 상위규범을 인정하지 않는 법실증주의자도 아니다. 드워킨은 실정법에서 발견되는 모순들과 흠결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실정법 체계 전체를 헤라클레스와도 같은 전능한 자의 힘을 빌려 매우 높은 추상의 단계까지 분석을 해보면 우리 대부분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위원칙들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그 원칙들은 실정법들을 평가하고 재해석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원칙들의 기저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들은 실정법의 제정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 제정자들의 특정한 정치적 성향과 역사적 배경의 작용을 구속하고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 가능성이 드워킨이 법현실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실정법을 비판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위원칙들은 드워킨의 손에서 대개는 과거회귀적인 법원칙들보다는 미래지향적인 법원칙들을 이끌어 내는데 이용되는데 바로 『생명의 지배영역(Life’s Dominion)』에서 독자들은 그 손재주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서문을 대신하고자 한다.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낙태와 안락사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헌법적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I. 낙태에 대하여

1. 낙태반대의 근거에 대한 하나의 가설

제1장과 제2장에서 드워킨은 낙태를 반대하는 근거에 대해 생각할 때 태아 생명의 독립적인 가치(detached value)와 파생적인 가치(derivative value)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독립적인 가치는 태아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의미이며, 파생적인 가치는 태아가 살 권리가 있으므로 - 즉, 권리의 주체이므로 -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후자의 가치는, 태아가 권리의 주체라는 사실로부터 파생된 가치이므로 파생적인 가치라는 말이다. 독립적인 가치와 파생적인 가치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국가가 특정한 예술품이나 역사유적들을 보호하고 이들을 파괴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파괴행위가 누구의 권리를 침해해서가 아니라 그 예술품이나 유적 자체가 가진 독립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유재산이라도 이를 훼손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그 재산이 독립적인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훼손행위가 소유자의 재산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며 소유자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동물이라면 우리는 훼손행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드워킨은 현재 낙태에 대한 논란은 태아의 생명이 가진 파생적인 가치에 천착하면서 불필요한 극한대립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낙태논란의 양 극단에 있는 가톨릭 교단과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들을 분석해 보면 처음에는 태아가 인간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낙태반대론자들은 낙태가 ‘살인’이라는 구호를 자주 사용하고 이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낙태는 살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어 마치 두 진영 사이에는 태아가 인간인지 여부에 대한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태아가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 양극단은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반낙태주의자들도 태아가 강간에 의해 수정되었을 경우에는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데 이는 태아를 권리의 주체인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의 출생사유가 강간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살인이 허용될 근거가 조금도 강해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태아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동의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낙태허용론자들이 낙태를 마음대로 허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낙태허용주의자들도 만약 태아가 인간이 아니다라는 믿음만으로 무장하고 있고, 불임수술처럼 시간, 장소,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성이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겠지만 낙태허용주의자들도 낙태시술에 어느 정도 제약이 있어야 된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태아가 권리의 주체인 인간이 아니기는 하나 그 생명이 내재적인 이유로 소중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태아가 인간인가의 파생적인 가치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쟁의 양극을 형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태금지론자들과 낙태허용론자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제3장에서 드워킨은 우리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근거도 생명체에 투여된 자연적 창조력(natural investment)과 인위적 창조력(human investment)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고 한다. 무엇이 내재적으로 소중한가? 즉 무엇이 그 중요성의 혜택을 받을 사람의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중요성을 가지는가? 드워킨은 내재적으로 소중한 것들의 예로 예술작품과 멸종위기의 생물들을 꼽는다. 신의 창조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현재 존재하는 종은 어떠한 창조력의 결과물이다. 예술작품은 역시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창조력 뿐만 아니라 그 선대나 당대의 문명이 녹아 있다. 이를 태아와 산모에 적용시켜 보자면 이제 막 발생한 태아의 생명으로서의 가치는 주로 신적?자연적 창조력이 그 근거가 되고 산모의 생명의 가치는 이외에도 상당한 인위적 창조력이 그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낙태 여부를 생명의 소중함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산모가 원치 않았던 갑작스러운 임신을 유지하여 자신의 인생에 투여된 인위적 창조력이 유실시키는 것과 낙태를 하여 아직 사람이 되지 않은 태아에 투여된 자연적 창조력이 유실시키는 것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대체로 인적 창조력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은 낙태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반면 자연적 창조력을 더욱 중히 여기는 사람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낙태허용론자들도 물론 태아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태아가 인간이 아닌 상황에서 과연 성숙한 인간인 산모의 생명의 가치 및 거기 녹아있는 인위적 창조력과 비교형량하였을 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 낙태금지론자와 충돌한다는 것이다.

2. 가설과 실정법은 부합한다

드워킨은 제4장에서, 자신의 가설에 따르면, 대부분의 낙태금지론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태아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생명으로서 소중하다는 입장은 1973년의 Roe대Wade판결의 판시와도 부합함을 확인한다.
즉 이 판결에서 미연방대법원은 연방헌법 상 태아는 인간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내재적 가치를 가진 문화재나 멸종동물 보호를 위해 세금을 걷듯이 생명의 보호를 위해 규제를 할 수 있다. 실제로 Roe대Wade판결은 태아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potentiality of personhood)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며 국가는 이를 보호할 정당한 공익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낙태에 대한 가치의 저울질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산모의 자기결정권이다. 이것은 산모의 생명의 가치와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산모가 인격을 갖춘 권리의 주체로서 낙태에 대한 판단에 포함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항목인 것이다. Roe대Wade판결은, 산모는 역시 낙태를 할 권리가 있으며 태아를 보호할 공익이 매우 커질 때만 이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고 하였고, 태아가 제2삼분기(trimester)를 지나는 시점에서 자생적으로 인간이 될 가능성을 획득하면서 태아를 보호할 공익이 매우 커지므로 그 시점 이후부터는 낙태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허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판결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실증주의자들은 미국헌법은 낙태권을 명시하거나 낙태권을 포함한 것으로 인정될만한 조항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국민의 대표들이 모여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것은 헌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드워킨은 제5장에서, 생명에 대한 논의를 잠시 중단하고 헌법해석론에 대한 논의를 펼치며, 헌법이 낙태권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거나 헌법의 창시자들이 헌법이 낙태권까지 보호할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다.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시점에서 유효한 제도, 법령, 판례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법실증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실정법(positive law)들 외에 규범으로서 존중되어야 할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드워킨은 실정법을 평가할 수 있는 상위규범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것이 정치도덕이다.
한편 드워킨은 법현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현재의 제도, 법령, 판례 등은 정치의 산물이며 서로 충돌할 수 있고 일관성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드워킨이 법현실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제도, 법령, 판례들을 모두 검토한다면 어떤 제도, 법령, 판례등은 재해석하거나 상황의 변화에 따른 예외로 인정하면서 일단의 지배적인 정치도덕의 원칙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은 이 정치도덕에 의미가 없다고 할 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고 법현실주의자들은 이 정치도덕이 도출될 수 없다고 할 때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드워킨은 법은 도덕적인 원칙들의 발현이고 그렇게 해석되어야 하지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법조문이나 법제정자들의 의도에 갇혀있어서도 안되고 법현실주의자들처럼 법이 정치의 산물이라고 해서 도덕적인 권위를 부여할 것을 아예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드워킨의 법철학이 미국헌법에 폭발적으로 발현된 결과가 바로 이 책의 제5장이다. 드워킨은 원칙의 헌법(constitution of principle)과 세부규칙의 헌법(constitution of details)을 구분하고 헌법은 헌법제정자들의 구체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법체계에 따라 변화하는 당대의 정치도덕에 부합하게 해석되어야 하는 추상적인 원칙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헌법에 어떤 조항이 있는지 없는지 헌법의 제정자들이 각 조항을 통해 무엇을 보호하려고 했는지를 준거로 헌법을 해석할 것이 아니고, 그 헌법을 해석한 판례나 적용한 제도를 포함하는 헌법의 체계 전체가 담고 있는 지고한 약속을 준거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워킨의 이와 같은 생각은 독창적인 결과를 낳는다. 드워킨은 미국헌법이 담고 있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칙을 다양한 사실관계에 적용하다 보면 특정 조항들이 없더라도 그 조항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제1수정조항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미국법원들은 오래 전에 제5 및 제14수정조항의 기본권 보장 조항 속에서 표현, 언론 및 종교의 자유를 발견하였을 것이다.” 또 드워킨은, 법실증주의가 실정법 외의 규범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판사들의 재량을 민주적으로 제한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법실증주의의 문언주의적 또는 원의도주의적 해석은 결국 실정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법의 공백과 흠결을 남기며 결국은 판사들의 재량을 더욱 확장할 뿐임을 잘 간파하고 있다.
결국 드워킨은 “낙태권”, 생식적 자기결정권 또는 프라이버시권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헌법을 그 문언이나 제정자의 의도만으로 한정하여 해석할 것이 아니고 헌법 체계 전체가 현대 세계에 어떠한 의미를 가져야하는가의 정치도덕적 문제로서 해석한다면 낙태권이 헌법으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Roe대Wade판결이 태아는 인간이 아니라고 판시하여, 현대 사회의 낙태에 대한 반대가 태아의 권리에 근거한 파생적 반대가 아니라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근거한 독립적 반대라는 드워킨의 가설에 부합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장엄한 “원칙의 헌법”으로부터 산모의 생식에서의 자기결정권을 헌법에서 도출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국가는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이유로 낙태를 규제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낙태를 전면금지할 수도 있는가?

3. 종교적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다

즉 사람들이 생명의 가치에 대해 입장이 다를 때 국가는 낙태를 금지할 수 있는가? 드워킨은 강제의 목표와 책임의식 증진의 목표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국가는 의회의 다수결을 통해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권리를 일부 제약하거나 국민이 그 가치를 존중할 의무를 자각하도록 만드는 교육, 상담 또는 홍보활동 등을 할 수는 있으나 이와 같은 공동체적 가치판단을 이유로 개인의 권리의 행사를 전면적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유산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판단을 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문화의 보존을 목표로 하는 세금을 걷음으로써 모든 국민의 재산권을 균등하게 제약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생명의 가치가 중요하다거나 또는 생명의 가치의 근거들 중에서 태아에 투여된 신적?자연적 창조력이 산모의 삶에 투여된 인위적 창조력 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고 하여 산모의 생식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낙태의 경우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공동체의 해석을 개인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국교분리의 원칙이다. 즉 현재의 다원적 사회의 다양한 제도, 법령 및 판례들을 분석해보았을 때 이 사회를 유지하게 해주는 정치도덕 중의 하나는 바로 국가가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개입을 하지 않는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국교분리의 원칙은 단지 국가가 특정 종교를 지원하는 것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강요할 수 없고 특정 종교의 교리가 요구하는 행위를 금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드워킨은 낙태논란을 해부해보면 신적?자연적 창조력과 인위적 창조력에 부여하는 상대적 중요성의 내용에 따라 낙태를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는 것인데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이와 같은 여러 해석의 차이는 드워킨에 따르면 종교적인 믿음의 차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드워킨과 그가 예시하는 판례들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종교인지 아닌지 판가름을 함에 있어서는 그 종교가 생명의 의미에 대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잣대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낙태에 대한 견해차의 기저에 있는 생명의 가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워킨의 낙태론은 페미니스트들의 그것과는 달리 국가가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 공동체적 판단을 내리고 이에 따라 국민을 상대로 홍보 및 교육을 하고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허용한다. 예를 들어 낙태숙려기간을 요구하는 법에 대해서는 국가가 개인들에게 생명이 소중한 지에 대해서 - 또는 태아에 투여된 신적?자연적 창조력의 중요성에 대해 또는 자신의 삶에 투여된 인위적 창조력의 중요성에 대해 -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요구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주장한다.

4. 소결

드워킨은 낙태 논란의 전선을 ‘태아가 인간인가’에서 ‘생명이 얼마나 그리고 왜 소중한가 - 생명에 투여된 신적?자연적 창조력 때문인가 인위적 창조력 때문인가’로 옮김으로써 낙태논란이 결국은 영적인(spiritual) 것을 밝혀내었다. 그렇다면 “심대한 종교적인 차이를 횡단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건립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고 그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자는 것이다.

II. 안락사에 대하여

안락사는 어떨까? 안락사에 대한 반대는 낙태에 대한 반대보다 더욱 복잡하다. 왜냐하면 태아의 폐기는 태아가 아닌 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안락사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죽는 자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안락사의 경우 낙태와 같이 죽는 자의 권리와 죽는 자의 생명의 내재적 가치가 구별될 수 있다. 그런데 낙태와 다른 것은 죽는 자가 자의에 의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자의 권리는 다시 (1) 죽겠다는 의사가 수용될 권리 즉 자기결정권과 그 외의 권리로 나누어진다. 이 때 이 나머지 권리를 드워킨은 (2) 자신의 최선의 이익이 보호될 권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3) 생명의 내재적 가치의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모두 검토되어야 한다.
드워킨에 따르면 우선 안락사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검토되어야 한다. 첫째 의식도 있고 정신적으로 정상인 경우(conscious and competent)로서 신체적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안락사를 택하는 경우를 말한다. 둘째, 의식이 없고 그러므로 정신작용 자체가 없는 경우(unconscious and therefore incompetent)로서 소위 식물인간상태를 말하는데 보통 환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환자가 의식을 잃기 전 정신이 올바른 상황에서 안락사를 희망한다는 의사표시를 했었다는 증거가 구두 또는 문서로 제시되기 마련이다. 셋째, 의식이 있고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경우(conscious but competent)로서 예를 들어 치매환자들을 말한다.

1. 지금 살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환자들의 문제

드워킨은 우선 위의 세 가지 유형 중에서 앞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해 논의한다. 크게 분류하자면 안락사 시행 시점 또는 이전에 안락사를 명시적으로 선택한 경우에 해당된다.
첫째, 의식이 있고 정신적으로 정상인 환자의 경우 그리고 의식이 없고 그러므로 정신작용도 없지만 의식이 없어지기 전에 안락사 의사를 밝혔던 환자의 경우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보호되려면 안락사는 허용되어야 한다.
둘째, 환자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s)에 근거한 안락사에 대한 반대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낙태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태아생명의 파생적 가치라고 명명하였던 것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안락사는 환자가 원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환자의 살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며 이미 죽을 의사가 실현될 권리는 이미 위의 자기결정권 논의에서 소진되었다. 여기서는 환자는 죽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죽음이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반한다고 하여 이를 저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드워킨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드워킨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고려할 때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s)과 향유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s)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이익의 차이는 드워킨의 저술시점 이후에 나온 영화인 「매트릭스(Matrix)」를 예로 들면 설명하기 쉽다. 그 영화에서 저항군들은 향유적 이익의 측면에서 보자면 매트릭스 속에 갇혀 기계가 제시하는 경험들을 향유하며 사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저항군들이 향유적 측면에서 최선의 이익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비판적 이익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이익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가진 소설처럼 평가되기를 바란다는 면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비판적 이익이 안락사에서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 이익은 타인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매우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향유적 이익을 따르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의 테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저항군 중에서 매트릭스로 돌아가기로 한 배신자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말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람의 비판적 이익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일생을 이해해야 하고 그 사람의 평소의 신념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무엇이 환자의 비판적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결정할 것이 아니고 환자에게 가까웠던 친지나 가족들에게 결정을 맡기는 것이 정치적 판단에 맡기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셋째, 낙태에 관한 논의에서는 독립적 가치라고 말했던 생명의 신성성(sanctity)에 근거한 반대가 있을 수 있다.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근거한 반대는 안락사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이다. 낙태에 대한 독립적 가치에 근거한 반대에서 설명되었지만 생명의 내재적 가치의 근거로는 자연적 창조력과 인위적 창조력이 있다. 드워킨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가에 따라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만약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있어 인위적 창조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기계에 몸을 맡기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것보다는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먼저 죽는 것이 생명의 신성성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낙태와 마찬가지로 안락사 역시 영(靈)적인 결정에 대해 공동체의 결정을 부과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이 타인이승인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삶을 공포스럽게 부인하는 방식으로 죽는 것은 파괴적이고 추한 독재의 한 형태이다.”

2. 살겠다는 의사를 미래에 표시할 환자의 문제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의식은 있으나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안락사는 어떻게 분석해야 할까? 즉 치매가 올 것을 대비하여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을 말한다.
의식은 있으나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가 위의 다른 두 경우와 다른 점은 자기결정권(autonomy)의 문제이다. 안락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치매가 진전되었다면 이들은 자신이 안락사를 요구하였다는 것은 모두 잊고 어린아이처럼 살아가길 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락사를 하지 않는다면 가지게 될 삶의 의지를 보호하기 위해 안락사를 불허해야 하는가?
우선 자기결정권은 치매에 걸린 사람의 안락사에 대한 반대 논리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드워킨은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자고 한다. 첫째 보통 자기가 내리는 결정은 자신에게 최선의 이익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결정은 자신의 최선의 이익의 증거가 된다는 의미이며 이를 증거론적 근거(evidentiary view)라고 한다. 하지만 증거론적 근거는 보통 적용되는 것이고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둘째 정합성적 근거(integrity-based view)가 있다. 자기의 결정은 자신의 표현이며 연장이다. 정합성적 근거 역시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의 자기결정을 존중해줄 정당성을 제공하지는 않으나 그 사람의 과거 결정(precedent autonomy)를 존중해줄 정당성은 제공한다. 즉 정신이상이 생기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자신의 삶을 전반적으로 회고하며 자신의 삶이 자신의 비전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안락사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면 이 결정이야말로 정신이상이 찾아온 후의 결정보다 우선하여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역시 비판적 이익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향유적 이익도 있지만 안락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환자의 비판적 이익은 심대하게 훼손될 수 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의 현재의 비판적 이익은 낮을지 모르나 그들이 치매에 걸리기 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비판적 이익에 대한 신념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는 사실 위의 두 경우와는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생명의 내재적 가치의 훼손의 정도는 그 사람의 죽기 전 정신상태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워킨은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큰 요소는 바로 그 삶에 투여된 인위적 창조력임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내재적 가치 상에서의 고려는 똑같다고 할지라도 비판적 이익이 무시되는 것은 인위적 창조력의 발휘를 무산시키는 것이 된다. 드워킨은 여기서 한 사람이 비판적 이익의 주체로서 인정되는가의 문제를 존엄성(dignity)에 대한 권리라는 특별한 권리로 규정하고 자신의 최선의 이익이 보호될 권리와는 별도로 논의한다. 드워킨은 이 두 개의 권리를 구분하기 위해 교도소의 예를 든다. 교도소는 죄수들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죄수들의 최선의 이익을 제약하기 위해 존재하며 특히 이들의 향유적 이익은 철저하게 박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수들에게 최소한의 무언가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바로 죄수들을 최소한의 비판적 이익을 가진 주체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생명의 내재적 가치의 구성요소로서 인위적창조력을 인정한다면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리어 치매에 빠져들 것이 확실한 사람이 ‘준비된 죽음’을 맞을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3. 소결

일반적으로 국가가 안락사를 금지하려 할 때는 죽고자 하는 사람 자신 보다 그 사람의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더욱 잘 알고 있다는 생각과 생명의 내재적 가치는 생명의 소유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드워킨은 후자의 생각에 대해서는 이미 낙태에 대한 논의에서 매우 강력한 형태의 답변을 이미 내놓았다. 즉 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해석은 종교적인 문제이므로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락사에 대한 논의에서 드워킨은 이에 덧붙여 안락사는 죽고자 하는 사람의 인위적 창조력의 행사일 수 있으며 이를 보호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보호하는 길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둘째 드워킨은 최선의 이익을 고려함에 있어서도 향유적 이익과는 다른 비판적 이익을 다룰 것을 요구한다.

III. 결어 - 2008년 11월 드워킨의 방한

드워킨의 글은 어렵지는 않다. 많은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철학적 개념들과의 친숙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드워킨의 모든 용어들은 드워킨의 저서 내에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드워킨의 글은 롤러코스터와 같이 빠르게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지나가며 매우 큰 반경의 원을 그리기도 하면서 독자의 주의력을 압도할 수 있으며 독창적인 개념과 논리들은 기존의 법철학 서적의 관습에 익숙한 사람을 도리어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이 책에 나오지 않은 예를 들자면 드워킨은 윤리철학의 모든 전통을 깨고 윤리(ethics)를 ‘자신이 행함에 있어서의 당위’로 도덕(morality)을 ‘남에게 행함에 있어서의 당위’로 번역한다. 이러한 연유로 길잡이의 역할을 하도록 써본 서문인데 실제로는 필자의 어줍지 않은 저널리즘의 발현이 된 것 같다. 필자는 서문에서 정확함보다는 간명함에 무게를 두려고 하였으니 서문만을 읽고 이 책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책 전체를 읽는 수고를 하는 사람은 그 보람이 있을 것이다. 2008년 필자가 이 역서의 초교지를 받아들고 허둥대고 있을 시점에, 드워킨은 한국학술협의회와 대우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드워킨은, 자신의 법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지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 『법의 제국』에서 그 존재만을 암시하였고 『자유주의적 평등론』에서 맛만 보여주었던, 보편적인 정치도덕의 최고 원칙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 필자는 드워킨 교수의 강연회와 세미나를 통역 및 주재하면서 근거리에서 드워킨의 입장을 접할 수 있었는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 원칙들의 바탕에는 결국 『Life’s Dominion』에서 설파하였던 ‘비판적 이익’과 ‘생명의 신성성’이 있었다. 『Life‘s Dominion』은 드워킨이 흔치않게 책 한 권 전체를 통하여 자신의 법철학을 단일 이슈에 적용해보인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법철학의 기반을 이루기도 한 책이었던 것이다. 생명으로부터 도출되는 법철학, 아름답고 그리고 솔직하지 아니한가? 『Life’s Dominion』은 실제로 드워킨의 가장 아름다운 저서로 꼽힌다. 10년 전 시애틀의 한 헌책방에서 법철학도 드워킨도 무지하던 한 변호사를 매료시켰을 정도로. 이 책은 그 후 수년 뒤 생명의료법연구소의 탄생을 준비하던 김현철 교수와 필자를 포함한 소장학자들의 모임에서 공동번역이 논의되었으나 연구소가 너무(?) 잘 되면서 보류되었었다.
아름다운 것을 바라만 보던 필자에게 번역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용기를 주고 - 또 다른 많은 영예로운 짐들을 지도록 해주는 - 김 교수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번 번역의 물적 기반을 마련해준 생명의료법연구소와 운영진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김 교수가 바쁜 사정으로 비운 공역의 자리를 뒤늦게 채운 내 처 지미에게도 감사한다.

연희동에서
박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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