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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5448152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15-05-22
책 소개
목차
제1부 호미
호미 14
양파 20
첫사랑 25
붉은 투구를 쓰고 32
갱죽 37
공 43
신발 1 49
신발 2 53
신발 3 57
토란 61
굿 66
개미허리 71
제2부 황사
황사 76
슴베와 낫놀 80
기근(氣根) 84
술병 89
쓴 박 95
고마리 99
비행기 카페 104
타래난초 109
실새삼과 딸기나무 114
청일점 119
학 124
제3부 직단
직단(織斷) 130
경면주사(鏡面朱砂) 137
석양 증후군 142
매니큐어 149
봉정암 길잡이 153
불청객 158
자박김치 163
밉쌀 168
착상 174
착각 178
복날 182
오해 187
제4부 풀밭
풀밭 192
솥뚜껑 198
성가정 퍼즐 그림 맞추기 203
비등점 209
땜질 216 삼 221
빈 택시 226
끼니 230
숭례문 235
기원 240
가래떡과 밀떡 245
갓바위의 가피 248
발문│그의 언어를 탐한다 홍억선 253
저자소개
책속에서
? 책 머리에 /채정순
하얀 옥스포드 천에 해바라기꽃 몇 송이가 붙어 있었다. 수예품 재료인데 꽃잎은 노란색, 이파리는 초록색, 씨 부분은 갈색으로 매우 사실적이었다. 각 부위에 맞는 색실로 아플리케 수를 놓고 아우트라인은 흰 구정불란사로 솔잎 뜨개를 해야 하는 앞치마감이었다. 이미 완성된 앙증맞은 앞치마 샘플이 교실 흑판 중간에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천성이 급하고 적극적인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수예 진도가 잘나갔다. 한데 주위의 다른 애들은 뭘 하는지 굼벵이나 진배없었다. 일의 진척을 감안한 선생님은 이 작품이 월말 고사 가정 성적에 들어가니 완성시켜 다다음 주일에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수예 시간은 일주일에 단 한 시간뿐이었다. 나는 며칠 만에 다 해 놓고 애들은 왜 꾸물대고 선생님은 또 말미를 그리 오래 두나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할 것이 없어진
그다음 수예 시간에 심심해서 자연 옆과 뒤를 보게 되었는데 그제야 애들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유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한 땀 한 땀 하는 바느질도 나보다 정성을 들이지만 솔잎 뜨개를 다박다박 꼼꼼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바느질 부분은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 정도로 실력이 비슷한데 뜨개질은 판이하게 달랐다. 일사천리로 해치운 나의 레이스는 바늘 코를 길게 빼어 엉성한 뜨개와 뜨개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 것 같은 데 비해 제자리 곰배라 생각했던 애들 것은 참빗의 살처럼 촘촘하고 짤막해 살갑기까지 했다.
그제야 ‘이게 아니구나? 내가 왜 이리 손 솜씨가 형편이 없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구나 나에게 학점 일 점은 자존심은 물론 장학금 유무와도 무관하지 않은 존재였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레이스를 풀어서 새로 뜨기 시작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코를 짧게 빼어 간격을 좁게 하려 애를 써도 도대체가 되지 않았다. “발뒤꿈치도 못따라 간다”는 성경 구절만 자꾸 떠올랐다.
뜨고 풀고 뜨고 풀고를 반복하다 보니 흰 실은 때가 묻어 꾀죄죄해지고 수조차 잦은 손자국으로 후줄근해져 스스로에게 실망해 비감에 젖었다. 드디어 검사 받는 날, 수예 시간은 마지막 시간표에 들어 있었다. 용의주도하게 완성시킨 애들은 점수를 잘 받고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집으로 갔다. 나는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엉성하나마 그대로 있었으면 기본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수예 점수를 온전히 놓치면 큰일이라 눈앞이 노랬다. 반 애들도 내가 저러고 있다고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이미 교정엔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나는 나닥나닥 때 묻은 실로 처음 일사천리로 나가던 가당찮은 실력을 내고 있었다. 그때 내 앞자리 친구가 제 것을 주며 선생님이 퇴근을 한다며 빨리 가 보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제가 검사를 받으러 가니 원래는 작품에 도장을 찍어 주고 선생님 노트에 점수를 기록하는데 선생님이 짐을 다 싸 버려서 제 작품에는 도장도 찍지 않고 노트에만 적더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 고맙다 할 겨를도 없이 교문을 향해 냅다 뛰었다. 앞치마를 찬찬히 살펴보던 선생님이 눈을 한껏 흘겼다. “너는 요렇게 손끝이 야무진데 좀 열심히 해 진작 검사를 맡지.” 귀찮은 표까지 냈다. 그래도 당신 백에서 노트를 찾아내어 A점수를 주고 가셨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제 물건을 받을 생각도 않고 하교한 그 친구 덕분에 나는 부모님께 여전히 효도하고 내 위상도 지켰다.
인생 가을에 접어들어 수필에 몸을 담았지만 내 글쓰기가 영락없는 그 수예품 꼴이었다. 글의 문맥은 되나 몰라도 엉성한 게 내가 봐도 참 한심했다. 수필은 누가 대신 써 줄 계제도 아니고 또 써 줄 사람도 없었다. 안되는 게 있다는 걸 몸소 체득한 나는 그때가 환기되어 수필을 미련 없이 접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내 안이 문제였다. 특별한 사건이 있거나 어떤 감정에 부딪힐 때마다 끄적거리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사실 뒤늦게 글방에 몸담게 한 주범도 기실 이 꿈틀거리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고개를 드는 욕망을 달래며 수족관 바닥 밑에 엎드려 있는 가오리처럼 꿈적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지도하는 교수님께서 어떻게 된 것이냐며 송수화기로 흔들어 깨웠다. 소원해서 용기를 주는 차원이겠지만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으니 자꾸 써 보라는 말에 슬며시 일어났다.
울고 싶은데 때리는 격이 되어 일단 한번 부딪혀 보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리하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다. 살면서 쌓인 이야기를 하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고 문우들의 글을 접하면서 마음을 숙성시키고 성숙되는 계기가 되었다. 밀도와 깊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워도 질은 높아지지 않고 더 너절해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글을 문우들은 혼자 말을 한다고 그리고 어렵다고 고개를 흔든다. 얼마를 가야 가을 들판의 황금빛 나락처럼 탱탱하게 영글는지 모르겠다.
먹은 나이 덕에 이야기는 될지 몰라도 세상에 내어 놓기가 두렵지만 용기를 낸다. 약간의 재미와 공감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2015년 만춘에 채 정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