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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가톨릭 > 가톨릭 일반
· ISBN : 9791185700113
· 쪽수 : 176쪽
· 출판일 : 2018-04-06
책 소개
목차
간행사
축사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다
유교사회를 비춘 새로운 빛
‘한역서학서’를 통한 천주교와의 만남
조선 지식인들의 천주교 이해와 강학 모임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첫 번째 시련
가성직제도의 운영과 성직자 영입운동
조상 제사 금지령과 신자들의 반응
윤지충ㆍ권상연의 순교
최초의 선교사 입국과 활동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전국 규모의 첫 번째 공식 박해―신유박해
박해의 여파
성직자가 없는 시기에 신앙의 터전이 된 교우촌
성직자 파견 청원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정하상의 활동과 성직자 영입 추진
조선 대목구 설정과 지속되는 박해
조선 대목구의 설정
초대 대목구장의 입국 시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기해박해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백색 순교자, 두 번째 신부 최양업
성영회의 활동과 신학교의 설립
베르뇌 주교의 활동
조선 시대의 최대 박해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들
문호 개방기의 미명(未明) 속에 성장하는 교회
선교와 신앙의 자유 획득
개항기의 조선 천주교회
학교의 설립
사회복지사업과 수녀회의 진출
신앙생활의 정비와 교안의 발생
한국 천주교회, 어둠을 뚫고 성장하다
국권 회복운동
교세의 확산과 교구 분리
새로운 선교회의 진출과 활동
수도회의 진출과 활동
순교 복자의 탄생과 문화 활동
조선 총독부의 종교정책
한국인 주교의 임명
해방시기의 교회
한국 전쟁의 피해
복구를 위한 노력
정치와 교회―교계제도의 설정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파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
103위 한국 성인의 탄생과 세계성체대회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응답
제3 천년기를 시작한 교회
저자소개
책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서적을 받은 이벽은 함께 천주교를 공부하던 사람들과 교리를 토론하며 그들에게 신앙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했으며, 그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 믿었다. 그리고 1784년 10월(음력 9월)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한 이벽과 권일신이 수표교 근처에 있는 이벽의 집에 모여 이승훈으로부터 대세(代洗)를 받았다. 이로써 이 땅에 천주교회가 설립되고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처럼 한국의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1984년 서울에서 열린 103위 한국 성인의 시성식에서 강조하였듯이 이 점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 대목구의 설정
조선 신자들이 1824년 혹은 1825년 교황에게 올린 편지는 1827년 교황청에 도착했다. 이 서한에 큰 감명을 받은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Cappellari, 1831~1846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추기경은 그해 9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랑글로와(Langlois) 신부에게 조선의 신자들이 성직자 입국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당시 조선 교회는 북경교구 관할이었다. 그러나 북경교구는 청나라 황실의 탄압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도 조선 교회를 포교성성의 관할 아래 두고자 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별도의 교구를 설정하여 적절한 선교 단체에 위임하고자 했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그들은 선교사 부족과 재정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새로운 선교지를 맡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다고 포교성성에 설명했다. 그러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지도자들은 아시아 여러 지역에 있던 소속 선교사들에게 교황청의 뜻을 알리며 조선 선교에 관한 문제를 협의했다.
이러한 전교회 본부의 편지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인물이 브뤼기에르(B. Bruguiere, 蘇, 1792~1835) 신부였다. 이전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곳에 사는 열성적인 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던 그는 당시 시암(현 타이) 왕국에서 선교하고 있었는데, 조선 선교 지원을 한 지 9일 뒤인 1829년 5월 28일 갑사 명의 주교 겸 시암 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교 서품을 망설였지만 이미 조선 선교에 간절한 원의를 품었기 때문에 자신이 주교로 서품되어 조선에 입국하면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 주교품을 수락했다. 조선 신자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 대목구의 설정은 아마도 한참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는 교황 칙서가 발표되었다. 자발적으로 교회가 설립된 지 47년 만의 성과였고, 신자들의 오랜 청원이 마침내 소중한 결실을 맺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은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