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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종 곤밥하르방

김광종 곤밥하르방

(제주 최초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

강민철 (지은이), 김창희 (기획)
컬처플러스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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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종 곤밥하르방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김광종 곤밥하르방 (제주 최초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5848266
· 쪽수 : 176쪽
· 출판일 : 2025-09-25

책 소개

밭농사 위주의 제주에서 전 재산을 쏟아부어 논을 일구고 쌀을 생산해 마을 주민들이 곤밥(쌀밥을 뜻하는 제주어)을 먹을 수 있도록 한 김광종 어르신에 관한 다큐멘터리 성격의 도서이다. 1

목차

후손의 말
저자의 말

1부 밭을 논으로 만든 김광종

1%의 ‘제주 논’
그리운 곤밥 그리고 화순리
제주 첫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 김광종
‘무모한’ 관개수로 공사

2부 김광종 어르신과 효명세자

‘바다 위의 지옥’ 만든 출륙금지령
관개수로 공사 비용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김광종 어르신과효명세자
김광종 어르신의 수입원이었던 ‘양태’
논을 만들어 준 대가

3부 화순리답회와 김광종영세불망비

논 주인들의 모임 ‘화순리답회’
논 주인과 위탁재배 농가의 수익 배분
도채비빌레에 세워진 ‘김광종영세불망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김광종길’
제주의 김광종과 한나라 태수 소신신

4부 그 많던 논들은 어디 갔을까

‘김광종 관개수로’에 흐르는 메세지
제주의 3대 수로 개척자
화순리의 마지막 논
김광종영세불망비와 관개수로 찾아가는 길

5부 증언

인터뷰_화순리 원로 지윤창 님
인터뷰_김광종 어르신의 5대손 김창진 님
홍순만 칼럼(1978년 10월 12일 자 제주신문)

⚫ 부록_김광종 가계도(家系圖)

저자소개

강민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제주에서 태어나 오름과 바다를 벗 삼아 자랐다.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녔으며, 30년 넘게 표준어를 익혔지만 가끔 제주어가 튀어나온다. <제민일보> 기자와 월간 <우리문화> 편집장을 거쳐 홍보회사 겸 출판사 ㈜컬처플러스 대표이사로 국가문화유산과 문화관광축제, 갤러리 및 문화예술인, 중소기업 등 다양한 홍보를 대행했다. 그런 한편 20여 년 넘게 출판기획자로 수십 종의 책과 잡지, 사사 등을 기획해 왔다. 저서로는 대학생들을 위한 취업 가이드 <회사 바로 들어가기, 돌아 들어가기>와 제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전하는 <올레감수광> 등이 있다. 최근에는 우리 주변의 ‘작은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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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철의 다른 책 >
김창희 (기획)    정보 더보기
신입사원에서 대기업 CEO까지 올라 ‘샐러리맨의 신화’를 쓴 전문 경영인이다. 제주 출신으로 1982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신입사원에서 12년 만에 이사로 최단기 승진에 이어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현대자동차 사장, 현대엠코 대표이사 부회장, 해비치호텔앤리조트 대표이사 부회장, 현대건설 대표이사 부회장)을 역임했다. 글로벌 경영자로서 싱가포르 해양 유류저장고, 아랍에미리트 원자력 발전소, 사우디아라비아 화력발전소 건설에도 참여했다. 제주도양궁협회장을 비롯 서울제주특별자치도민회장, 재외제주도민회총연합회장, 재외제주경제인총연합회장,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2023년 제주특별자치도문화상을 수상했다. 제주대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꾸준히 노력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제주대는 ‘김창희 BMI 세미나실’을 개관했다. 현재 자동차 부품기업 (주)비엠아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제2의 인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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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프롤로그-01

|후손의 말|
김광종 할아버님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며

중고등학교 시절.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는 밭들로만 이뤄진 제주의 여느 마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한경면 저지리 본가를 떠나 친척이 사는 화순으로 향했다. 그곳엔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황개천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싱그러운 자연을 만끽하곤 했다. 할아버지와 지역 어르신들로부터 김광종 할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들은 것도 그때쯤이다.
김광종 할아버님은 나의 5대조로 10년간의 관개수로 공사를 통해 창고천의 물을 황개천 부근 밭으로 끌어와 논을 일구신 분이다. 그 덕분에 화순리를 비롯한 타 지역민들은 제사 때 조상님께 쌀로 메(제사상에 올리는 밥)를 지어 올리고 가족들도 희고 고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쌀밥을 좋아했지만 5대조 김광종 할아버님 이야기는 전설처럼 아득하게만 들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나는 대기업에서 수십 년 동안 일벌레로 살아왔다. 어떤 해는 꽃이 피는 줄도 모른 채 일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좋아서 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로라하는 스펙을 지닌 인재들과 함께하려면 조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덕분에 회사에서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업무에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즈음 고향 안팎에서 나에게 무거운 직책이 주어졌다. 제주도양궁협회장을 비롯해 서울제주특별자치도민회장, 재외제주경제인총연합회장, 재외제주특별자치도민회총연합회장, 서울제주도민회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게 되었다. 모교인 제주대에서도 석좌교수와 한림회 회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부담감이 컸으나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고향을 살리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보람된 시간이었다. 멀리 떠나있던 고향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제주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다.
평생 몸담았던 대기업에서 벗어나니 나름대로 여유도 찾을 수 있었다. 삶의 속도를 줄이자 흐릿한 기억 너머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릴 때 말로만 들었던 다름 아닌 ‘곤밥 하르방’ 김광종 할아버님이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고향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화순리 도채비빌레 동산에 비로 남아있는 김광종 할아버님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고향 제주를 사랑한다면서 조상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다.
김광종 할아버님은 논이 드문 제주에서 안덕계곡의 풍부한 수량을 이용해 화순리 황개천 일대를 광활한 논으로 일군 제주 최초의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이다.
1832년 (순조 32년) 3월 나이 마흔 무렵에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해 10년만인 1841년(헌종 7년) 9월 마침내 완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주변의 멸시와 조롱을 무릅쓰며 암벽을 깎고 바위를 뚫는 악전고투 끝에 이뤄낸 쾌거였다.
총연장 1,100미터(비석에는 670미터로 새겨짐)에 이르는 관개수로를 따라 안덕계곡 창고천의 물줄기가 황개천 부근 들판으로 스며들었고, 이윽고 메마른 땅은 논으로 변했다. 이후 논의 규모는 1만 평에서 5만 평으로 확대되었다.
도채비빌레에는 한문 비 말고도 김창진 사촌 형님이 제안해 세운 한글 비가 있다. 비문을 보면 마을 주민들이 향그러운 쌀을 먹을 수 있게 해준 김광종 할아버님을 전한시대의 태수 소신신에 비유하며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있다.
논 주인들의 모임인 화순리답회는 김광종 할아버님을 전조로 여겨 매년 5월경 이 도채비빌레에 올라 야제를 지내며 그의 공덕을 기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논 일부가 남제주화력발전소 부지로 수용되기 시작한 데다 쌀의 수익성마저 떨어져 농가들은 더 이상 논농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화순리답회도 수년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이대로 가다가는 김광종 할아버님이 새까맣게 잊혀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함마저 밀려들었다.
김광종 할아버님은 자연의 역경을 극복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 분으로, 제주인이 지닌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정신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척정신과 지역 사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시대적 가치다.
누군가는 김광종 할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오랜 고민 끝에 한 권의 책으로 펴내기로 했다. 이 책은 김광종 할아버님의 관개수로 개척 이야기를 기억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기록으로 전하려는 후손의 소박한 마음이다.
김광종 할아버님을 기억하고 사랑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김광종 할아버님을 전조로 모시며 매년 제사를 지내온 화순리답회 관계자와 주민 여러분, 김광종영세불망비 향토유형유산 제39호 지정에 힘쓴 화순리 마을회와 주민들, 한글 비석을 새롭게 건립하는 데 힘쓴 김창진 사촌 형님(5세손)을 비롯한 김광수 제주도교육감(6세손), 김상범 현대부품 사장(7세손) 등 친인척 여러분, 그리고 김광종길을 지정하고 김광종영세불망비를 향토유산으로 지정한 제주도 관계자, 그리고 김광종 할아버님의 관개수로를 따라 도막은소부터 도채비빌레까지 데크(나무계단)를 설치해준 서귀포시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 밖에 제주 최초의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 김광종의 발자취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써준 언론인과 향토사가, 그리고 곤밥하르방 김광종의 정신을 되새기며 도채비빌레를 찾아주는 답사객과 시민 여러분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더불어 이 한 권의 책이 ‘제주 최초의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 김광종’을 돌아보며 개척정신과 이웃사랑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기원해 본다.

김광종 할아버님의 5세손
김창희


프롤로그-02

|저자의 말|
10년간 관개수로 개척한
작은 영웅의‘큰 물길’

2025년 5월 29일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 들어섰다. 동행한 친구가 가게에 들른 사이, 폭낭(팽나무를 뜻하는 제주어) 아래에서 우연히 나이 지긋한 분을 만났다.
“혹시 화순리에서 관개수로를 개척해 논을 일군 김광종 어르신에 대해 아십니까?”
“저는 외지 사람이라 잘 모르지만, 마을 역사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이분의 안내로 화순리 주민 지윤창 님을 만났다.
도채비빌레에 있는 김광종영세불망비(한문 비, 한글 비)에 대해 문답을 나누다가 깜짝 놀랐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는 분이 바로 1938년 김광종영세불망비에 찬[贊]을 한 고[[[故 지혁중 선생의 손자였다. 게다가 1968년 한글 비의 문장과 글씨를 쓴 고故 지동수 씨 아들이기도 했다. 운 좋게도 ‘임자’를 딱 만난 것이었다.
김광종 어르신(1792~1879)은 제주 최초의 민간 주도 관개수로 개척자이다. 한경면 저지리 출신의 그는 1832년부터 1841년까지 10년간 암벽을 깎고 바위를 뚫는 악전고투 끝에 670미터의 관개수로를 완공하고 창고천의 물을 끌어들여 광활한 논을 만든 주인공이다. 그 덕에 사람들은 제사와 일상에 사용할 귀한 쌀밥(곤밥)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논은 황개천 일대 5만 평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김광종 어르신은 지금도 ‘논하르방’, ‘곤밥하르방’으로 불린다.
김광종 어르신의 생애와 업적은 두 기의 김광종영세불망비를 통해서 개략적으로나마 파악이 가능했다. 하지만 세부 자료나관련 문헌이 부족해 막막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사실과 의견이 섞이지 않도록 논문 형태의 인용 표시를 빌어가며 경계선을 그었다.
김광종 어르신의 막대한 관개수로 공사비 마련도 궁금했다. 여러 문헌을 통해 김광종 어르신이 갓양태를 육지로 가져가 팔면서 수익을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제주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와서 이문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이를 좀 더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제주도를 만 196년 동안 ‘바다 위의 감옥’으로 만들었던 출륙금지령과 제주 특산물인 갓양태의 생산·유통·수익 구조까지 이야기를 확대해 보았다. 덕분에 자본 축적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다. 그러던 차에 <화순리지>의 한 대목이 흥미를 끌었다.

“횡재수가 있어서였는지 한양에 당도하자마자 때마침 국상[國喪]이 났는데, 김광종[金光宗]이 가지고 간 양태는 그 날로 부르는 것이 값으로 날개를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김광종 어르신이 한양에서 국상이 나는 바람에 양태가 불티나게 팔려 많은 돈을 벌었다라는 이야기다. 과연 이 국상이 실제로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이를 추적해 보니 <화순리지>에 나오는 국상은 1830년(순조 30년) 5월 6일 향년 20세로 세상을 떠난 효명세자의 죽음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조선의 세자와 제주의 한 상인이 나비효과처럼 연결되어 세자의 못다한 꿈 한자락이 화순리의 논으로나마 실현되는 것 같아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1938년 5월 화순리답회와 후손들은 김광종 어르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도채비빌레 동산에 김광종영세불망비를 세웠다. 1968년 4월에는 김창진 전 제주시장(김광종 어르신의 5세손)의 제안으로 기존의 한문 비를 번역한 한글 비가 화순리답회와 마을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한문 비(앞면)와 한글 비(뒷면)에는 “김광종 어른신의 공덕[功德]으로 인해 주민들이 향그러운 쌀을 먹을 수 있다”며 김광종 어르신을 전한시대의 태수 소신신에 비유하고 있다.

穿山引水[천산인수] 漢西開始[한서개시]
多費己財[다비기재] 以裕後世[이유후세]
食我香稻[식아향도] 賴公德基[뇌공덕기]
功擬召父[공의소부] 歲祈田祖[세기전조]

세월의 풍상 속에 논도 메말라갔다. 보기만 해도 배 불렀던 화순리의 논은 1977년 남제주화력발전소 건설 부지로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줄어들었다. 이어 1980년대 후반 비닐하우스 도입, 1990년대 쌀 수익구조 악화로 결국 대부분의 논은 밭으로 변했다.
더는 ‘곤밥’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곤밥은 탄수화물이 많다는 이유로, 오래 못 산다는 이유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나 건강을 중시여기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찬밥 신세다.
하지만 김광종 어르신의 ‘애민’과 ‘개척’의 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하다. 무엇보다 관이 아닌 민간 주도로 관개수로 공사가 이뤄졌고, 제주 농촌사회에 변화를 일으켰으며, 화순리를 비롯한 제주인들에게 쌀로 메를 지어 제사상에 올리고 가족들과 ‘곤밥’을 먹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은 김광종 어르신의 삶과 업적을 기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5세손 김창희 (주)비엠아이 대표이사 회장(전 현대건설 부회장)의 소박한 뜻에서 출발했다. 김광종 어르신에 대해 집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김창희 회장을 비롯해 언제나 든든한 힘이 되어 주시는 백명윤 전 제주특별자치도민회장, 인터뷰에 응해준 지윤창 님, 김창진 님(5세손), 양재현 전 안덕면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고완수 화순리답회 총무님 부부, 화순리 주민 이보성 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답사길에 동행하며 제과점 옆에 주차해 절묘하게 지윤창 님을 만날 운명을 만들어준 김효용 비전헬퍼 대표, 문헌 조사에 도움을 준 조카 박다예, 정성으로 디자인을 완성한 고혜란 편집디자이너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나이 마흔에 관개수로를 착공해, 집념과 불굴의 의지로 10년 만에 완공한 김광종 어르신. 그의 ‘애민’과 ‘개척’의 정신이 21세기 오늘 콘크리트와 같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주저앉은 누군가에게 다시 일어설 ‘희망’과 ‘용기’가 되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 지역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계속 발굴되고 기록되기를 소망해 본다.

‘김광종길’을 걸으며
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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